인천 출신 화가 중에 인천의 옛 모습을 가장 잘 담아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김영건(1915~1976)을 들 수 있다. 세 차례나 조선미술전에 입선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그의 화폭엔 늘 '인천'이 있었다. 그의 풍경화 대상이 된 용동큰우물과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인천항 그리고 청관(淸館)거리 등은 인천의 근대성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동큰우물은 인천시 민속자료 제2호로 남아 있고, 만국공원은 복원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또 인천항은 여전히 국내 대표항구로 역할을 하고 있고, 청관거리는 차이나타운 활성화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인천의 상징물에선 옛 모습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몇 십년의 세월이 그 흔적을 모두 지운 것이다. 그나마 김영건의 그림이 있기에 추억이라도 가능하다.
인천출신 미술평론가 김인환씨는 1996년 '김영건 인천 풍물화전'이 열렸을 때 "그의 유작이 발굴됨으로써 소재적 차원에서 인천항의 옛 모습을 그림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간접적인 연상에 의해 복원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수확"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지난 29일 오후 2시. 김영건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용동 큰 우물' 현장을 찾았다. 모텔과 여인숙, 칼국수집, 그리고 이런저런 음식점들이 즐비한 중구 용동 큰 우물 거리 한 구석에 화제(畵題)의 그 우물이 있었다. 펜스로 두른 우물가엔 전날 취객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역한 오물이 흉물스러웠고, 쓰레기가 둥둥 뜬 물은 썩어 있었다. '고종 20년(1883) 제물포 개항과 더불어 만든 현대식 우물이다. … 1967년 육각정을 지어 우물을 보호하고 있다'는 인천시 민속자료 제2호 알림판 문구가 어이없을 뿐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동정 박세림의 제자(題字) 보다도 큼지막하게 쓴 중수기(重修記)였다. 민선 초대와 2대 구청장의 이름이 선명한 중수기는 '…긴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우물의 맑은 샘물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왔으며, 용동의 역사와 성장의 길을 같이 해 왔다'고 중수 이유를 밝히고 있지만 지금의 모습에선 전혀 그 가치를 되새길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김영건의 '용동 큰 우물'에선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여인네들이 커다란 물동이를 이고 있는 모습이며, 어린 아이가 젖먹이 동생을 업고 나온 것이며, 우물에 얽힌 우리 삶의 궤적이 선연하다.
화가이면서도 간판집을 운영해야 했던 곡절 많은 생을 살다간 김영건은 유독 '인천'에 몰입했다. 아니 서민생활에 집착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낸 이경성 선생은 김영건을 일컬어 '철두철미하게 향토화가'라고 한다.
인천대학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있는 박석태씨는 그의 석사논문 '일제강점기 인천의 화단-향토색 논쟁을 중심으로'(2006. 12)에서 김영건을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인천 출신의 조선인 작가'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를 졸업한 김영건은 젊은 시절 잠시 일본에서 창작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 때 태평양 미술전람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선했다고 그의 제자인 이경식은 밝히고 있다.
이경성 선생은 "나와의 관계는 해방 이전 인천의 내동에 살면서 화가로서 선전(조선미술전) 등에 출품하고, 초기 인천화단의 개척자로서 나의 소년시절 인상에 남는 존재였다"면서 그림에 신들린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회고했다. 이경성 선생은 또 자신보다 4살이 위인 김영건이 그림에 미쳐서 집안에서 내쫓겨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얘기한다.
김영건은 20세가 되던 19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선전)에서 풍경화 2작품이 입선한 이후 제17회(1938)와 제23회(1944) 선전에서도 입선한다. 당시의 인천 화단에서 공인된 선전에 입선, 화가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은 것은 김영건이 유일했다고 한다.
그는 1952년 대한미술협회 인천지부 조직에도 참여하는 등 지역 화단활동도 열심히 했다. 또 유희강, 우문국, 이경성 등이 1969년 창립한 미술가 모임 오소회(五素會)의 전시회에도 빠지지 않고 출품했다. 이 시기 그는 또 2번의 개인전도 가졌다.
이 때는 인천에 전시회 공간이 마땅치 않아 은성다방에서 그림전시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 은성다방 전시회는 인천 초기 화단의 활력소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영건은 선미사(線美社)란 이름의 간판집도 운영했는데, 생업으로 했다고 한다. 간판점이 꽤 잘 돼 생활에 여유도 있던 김영건은 신포동 시장골목의 허술한 주점인 백항아리집의 단골이었다. 이 백항아리집은 당시 인천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어울리던 중요 공간으로 자리잡게 된다. 창작여건이 좋지 않던 때의 예술가들이 일상을 털어버리던 장소로 백항아리집이 애용됐고, 김영건이 이런 자리를 주도했다고 한다.
미술협회 경기도지부장을 맡는 등 의욕적 활동을 펼치던 김영건은 늦게 본 외아들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76년 작품 제작 중 뇌출혈로 쓰러졌고, 결국 62세의 삶을 마감했다.
김영건과 관련한 자료를 빼놓지 않고 있는 미술평론가 이경모씨는 "김영건은 인천의 미술인 중에선 중요한 지점에 있다"면서 "그의 작품을 통해 근대 인천 풍경을 재조망하고, 또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다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김영건의 작품세계
몇가지 유형의 패턴으로 나눌 수 있다. 평론가 김인환씨는 고향 인천에 대한 향토색 짙은 애정과 서민 생활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 그리고 인물이나 동물의 자태에 대한 나름의 관찰·표출 등을 김영건 작품의 특색으로 정의한다.
만국공원에 올라서 바라본 인천항의 풍경, 또 인천상륙작전 때 부서졌지만 그래도 남아 있던 청관거리 모습, 만국공원의 상징물인 인천각 풍경 등은 그의 인천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녹아 있다.
여인 누드도 그의 작품세계에서 한 목록을 이룬다. 김영건의 누드엔 세잔느나 피카소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요소가 있다고 김인환씨는 평가한다. 한 가지 특징은 인체의 실체적 묘사에 의하지 않고, 가상의 여인나상을 통해 리드미컬한 화면의 율동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또 70년대 이전의 신포동 시장골목, 수인선 철도변 모습 등도 화폭에 담았던 그는 동물화도 그렸다. 만년에 그는 여러 애완견을 키웠는데, 그 형태와 동작을 얼마나 주의깊게 관찰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동물화에선 그의 깊은 묘사력이 잘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수묵필법으로 그린 민화풍의 호랑이 그림도 있고, 정물화도 있다. 그의 작품세계가 어느 한 대상이나 장르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의 제자로는 이철명과 이경식 등이 있다.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