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정부시 전경. 의정부시의 생김새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복주머니 모양의 분지이다. 남쪽으로만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로 터져있고 그 사이로 국도와 하천, 경원선전철이 지나며 새로이 지하철 7호선과 외곽순환고속국도가 통한다. 사진/조형기전문위원·hyungphoto@naver.com
   63. 삼방로 > 2 < - 북으로 북으로 곧게 뻗다

   옛길을 답사할 때마다 와닿는 느낌이지만 모든 길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다. 오랜 세월 시행착오를 거치고 확정된 길이었으니 당연히 편리한 노선으로 확정된다. 어느 권력자가 임의대로 바꾼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통행하지 않으면 그 또한 의미없는 길 아닌가?

   삼방로도 마찬가지다. 도성을 벗어나 북진하면서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를 교묘하게 피해가며 길을 냈는데 이는 중랑천의 상류이므로 거의 본능적이라고 할 만큼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다.

   말도 많고 탈도 무성했던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의 큰 골칫거리가 바로 이 두 산 때문이었다. 사패산 터널과 수락터널 불암터널 등 멀리서 보기에도 단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암봉을 뚫어야 하고, 인근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반대까지 극복해야 했으니 난공사도 이런 난공사가 없으리라. 여기에 비하면 삼방로의 이 구간은 얄미울 정도로 미끄러지듯 잘 빠져 나갔다.

   ■ 도봉과 수락의 자태는 인물을 만들고

   도봉산의 위용을 어찌 이 짧은 글로 표현하겠는가? 또 수락산의 아름답고도 수려하면서 고고한 자태를 어찌 그려내겠는가? 삼방로를 걸어가던 옛사람들의 감동은 지금보다 더했을 것 아닌가?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1년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수락산의 바위가 붕괴되어 사람들이 압사당한 것을 기록하였다. 특히 세종 1년에는 높이 23척, 너비 28척 크기의 바위가 떨어졌다고 하니, 고대로 돌아갈수록 도봉산과 수락산의 풍치는 더욱 좋았으리라.

   도봉산 자락 망월사역 가까운 곳에 산악인 엄홍길 전시관이 들어섰다. 의정부시 호원동사무소였던 건물이다. 엄홍길의 업적과 산악 장비들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였다. 도봉산 중턱에서 삶을 이끌었던 부모님을 따라 유아기, 소년기를 보냈으니 크고 작은 바위들과 계곡이 놀이터요 산악 학습장이었으리라. 엄홍길이 히말라야의 높은 산들을 오르내린 커다란 발자취는 결국 도봉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랴!

▲ 엄홍길전시관
   엄홍길이 도봉산에서 산악 활동의 영재성을 어려서부터 스스로 일구어 나갔다면, 수락산은 오세 천재 김시습이 시재를 다듬고 완성시킨 곳이다. 엄홍길은 길이면서도 길이 아닌 설산을 거닐어 산악 운동의 큰 길을 열었고, 김시습은 우리 문학사에 새롭고도 굵은 길을 열지 않았는가. 매월당이라는 호 못지않게 동봉(東峰)이라는 호를 자주 쓴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락산을 사랑한 김시습의 마음이 느껴진다. 서울의 동봉이 수락산 아닌가.

   폭천정사(瀑泉精舍)에 은거하면서 농사 짓고 글 쓰던 김시습이 부러웠을까. 서계 박세당은 김시습의 영당(影堂)을 짓고 추모하며 제자들을 길러낸다. 손수 농사 지은 경험을 살려 농서인 '색경'을 저술한다. 실학정신이 바탕에 깔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성들이 보다 쉽게 농사짓도록 새 길을 열어준 셈이다.
▲ 어사대비. 양주 불곡산 남쪽 새로 복원한 양주 동헌 뒤에는 '어사대'비가 있다. 정조가 세조의 능인 광릉에 행차할때 양주 관아에 머물며 신하들과 활쏘기를 즐겼고 그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양주목사 이민채가 비를 세운 것이다.

   ■ 왕족의 발자취 서린 곳

   의정부시 땅의 생김새는 사방을 산이 에워싼 복주머니 꼴의 분지다. 다만 남쪽은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로만 터져 있다. 이 좁은 틈으로 하천이며 국도 경원선 철로(전철)를 비롯하여 지하철 7호선이 지나고, 외곽순환고속국도까지 가로로 지나면서 만나게 된다.

   태종 6년 태조와 태종이 갈등을 안은채 오랜만에 만났던 곳이 지금의 의정부시 호원동 전좌마을이라고 전해 온다. 여기는 그럼 필연적으로 만남의 땅인가? 등산객들의 만남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실록에 의하면 옛 양주 땅이었던 이 곳에는 둔전도 많았고 말 목장도 경영하였으며 왕들의 사냥터로도 인기가 좋았다.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이 대부분 사냥을 이 곳에서 즐겼는데 매사냥만큼은 직접 하기가 어려워서 그랬는지 구경하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남쪽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산으로 감싸졌으니 동물도 많았으리라. 도성에서 가깝기도 하고.

   세조의 광릉으로 행차하는 능행길도 이 길임에랴.

   삼방로 가운데 의정부시와 양주시의 경계가 비립거리다. 의정부시 녹양동과 양주시 마전동으로 나눠지는 언덕인데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곳은 한강의 북쪽 수계인 한북정맥이 지나는 마룻길이다. 포천쪽에서 내려온 정맥이 도봉산과 북한산으로 이어지기 전에 의정부시를 북쪽에서 감싸고 넘어간다. 정맥을 넘으면 수계가 달라진다. 그 경계에 비석을 세워 오고가는 사람들이 쉬면서 보기좋게 해준 것이다.
   ■ 공간의 길과 시간의 길이 교차하는 곳

   정맥으로 인해 수계가 달라지면 문화 역시 차이를 보인다. 한북정맥 넘어 동두천시를 거치고 연천군으로 이어지는 삼방로는 임진강 수계와 맞물린다. 도성에서 멀어지면서 왕실과의 관계도 점점 줄어들게 된다. 동두천시 한복판에서 삼방로를 따라 흐르는 신천은 한탄강에 물을 보태고 한탄강은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신천과 한탄강이 모이는 곳에 교묘하게도 38선이 지나고, 이 언저리가 전곡리 선사 유적지다. 시간의 길과 공간의 길이 또 입체적으로 만난 지점이다. 게다가 '38선'이 주는 이념의 길까지.

   미국인 병사가 발견하여 우리 학자들이 발굴하였는데,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주먹도끼 등이 수천 점이나 나와서 수십만 년 전 구석기 사람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일본인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가 일본 구석기 유적을 조작하게 만들었던 원인 제공지이기도 하다.

   한탄강은 논밭이나 길보다 낮게 흘러 높은 수직 벼랑을 강 양쪽으로 거느린다.

▲ 전곡리선사유적지
▲ 학곡리 현무암고인돌












   백두산 한라산과 더불어 연천과 철원 땅이 지질적으로 볼때 우리 국토의 막내라는 증거다. 화산 활동에 의해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이 산재했고 수직 벼랑의 주상절리도 신기하기만 한데 그 압권은 재인폭포가 단연 1등이다. 물을 가두는 보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콩과 옥수수나 겨우 심었던 땅이다. 지금이야 저수지도 많고 양수기로 강물을 퍼내기도 하여 논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없다. 특히 삼방로의 철원평야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버려진 땅이었다고 한다.

   벌레 먹은 돌이라고 무시하던 현무암이지만 단단하기는 그만이다. 연천 지역에서는 현무암 고인돌도 볼 수 있고, 성벽에서도 현무암 성석이 심심찮게 보인다. 맷돌을 깎아 이 지역 특산으로도 발전시켰으니 현무암은 고맙기 그지없는 돌이다. 더구나 지역 특산물 가운데 콩도 유명하므로 맷돌로 갈아 만든 손두부 맛이 발길을 잡지 않는가?

   ■ 통일이 오는 길

   삼방로는 길이 평탄하여 조선시대 금강산 가는 길로도 각광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 서울에서 원산까지 가는 철로 역시 삼방로를 따르는데 금강산 가는 여행객들로 붐벼서 복선 철로를 깔기에 이른다. 모든 길은 수요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공사는 중지되고 남한과 북한으로 나눠지면서 50년 넘게 아직도 중지 상태다. 신탄리역을 지나면 옛 철로의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경기와 강원이 나누어지는 개울에는 갈대도 무성한데 철로 다리의 잔해와 50여년 전에 새로 세우다만 시멘트 교각이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뚫다가 중지한 터널 북쪽 끝에는 고드름이 한창이다. 마치 땅에서 솟아난듯이 보이는 역고드름과 천장에서 흘러내린 고드름이 서로 붙기도 하고 기묘한 모양을 빚어낸다. 상하가 서로 붙듯이 남북도 서로 붙는 날이 오리라.

   신탄리역 '철마는 달리고 싶다' 표지판 앞 레일에는 대학생들의 낙서가 어지럽다. '통일이여 오라', '통일아 사랑해♡'

   /염상균 역사탐방연구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