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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져 방치된 경원선철교와 교각. 1910년 10월 기공되어 1914년 8월 개통된 경원선은 주행시간이 약 8시간이 걸렸다. 개통된 경원선을 이용, 금강산 절경을 즐긴 이도 많았지만 많은 백성들이 이주의 한을 품고 원산을 거쳐 북만주와 간도로 향했다. 기적소리 끊긴지 반세기여. 동강난 교각이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사진/조형기전문위원·hyungphoto@naver.com | ||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우리의 산천은 단연 금강산이었다. 이는 조선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떤 중국인도 그러하였고, 제주도에서 여인으로 태어났던 만덕이 정조의 부름을 받았을 때의 소원 역시 한양의 궁궐 구경과 금강산 구경이었다.
예조판서였던 월사 이정구(1564~1635)조차 함흥의 화릉(태조의 아버지 이자춘의 묘) 봉심을 핑계로 40년 숙원이었던 금강산을 찾았을 정도였다. 금강산을 보지 못하고 죽는 천추의 한을 들이대며 함흥을 가겠다고 하는데 그 누가 막을손가?
금강산. 그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조선 산천의 아름다움과 자부심이었다.
금강산을 가기 위해 1485년 4월15일 서울을 출발한 추강 남효온(1453~1492) 일행은 보제원(普濟院)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90리 길을 가서 입암에서 잤다. 4월17일 소요산을 지나 대탄(大灘)을 건너 60리 길을 가서 연천에서 쉬었다. 이튿날 보개산을 지나 철원 옛 동주평야를 지나 남으로 100여 리를 가서 김화에서 잤다. 그렇게 2달 간의 남효온의 금강산 여행은 시작되었다. 김화를 지나 단발령을 넘는 것이 금강산을 가는 일반적인 코스였다.
이렇게 삼방로는 금강산 가는 길이기도 했다. 그 길을 따라 기찻길이 놓였다. 경원선이다.
1903년 10월 대한제국 정부는 서울에서 원산을 거쳐 경흥(慶興)에 이르는 철도를 놓고자 했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끝내 경원선은 일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1910년 10월 경원선이 기공되어 이듬해 9월 용산에서 의정부까지 개통되었다.
그리고 의정부~연천 구간은 1912년 7월 운수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연천~철원 구간은 10월7일부터 운수업무가 시작되었으나 철원~월정리~평강~복계 사이는 이듬해인 1913년 6월에야 개시되었다. 삼방로를 따라 개설된 경원선은 1914년 8월 완전 개통되었는데 서울에서 원산까지는 약 8시간 10분이 넘게 걸렸다.
금강산 가는 철길은 철원역에서 갈라졌다. 환승역이었던 철원역은 당시 서울의 남대문역보다 규모가 컸다. 금강산 가는 길은 철원에서 금강산 전철로 바꿔 타고 금강구(金剛口)까지 가면 자동차로 장안사(長安寺)까지 갈 수 있었다. 그나마 1931년 이후 장안사까지 전차가 직통하게 되었다. 이렇게 금강산 가는 길이 쉬워졌던 것이다.
물론 이 길은 천하의 절경을 담고 가는 길이었다. 일제 조선총독부 철도국도 이를 상업적으로 선전할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박달성(朴達成)은 경원선 일대의 풍광을 세계적 명승으로 손꼽고 있다. 서울 남대문에서 떠나 종남산을 끼고 한강을 굽어보는 광경, 청량리의 솔바람(松風), 우이동의 앵두나무꽃, 삼각산의 기암절벽, 소요산의 단풍, 보개산의 폭포, 평강의 고원(高原), 삼방의 약수, 석왕사의 송백(松栢), 원산의 갈마반도, 통천의 총석(叢石), 금강산의 별경(別境)은 실로 세계에 견줄 바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낮의 그 화려함에 비해 밤 열차는 사뭇 다른 풍경을 자아내며 달렸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그것은 풍경의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 아닌 고단한 삶의 또 다른 탈출을 꿈꾸는 만주로 가는 북행열차였을 뿐이다.
삼등칸에서 만주로 이민가는 그들은 지쳐 쓰러져 아무렇게나 잠들었다. 소작료와 공출을 하고 나면 남는 것은 등겨 몇 되뿐인 살림을 견디기 어려워 어린아이들을 앞세우고 고향 땅을 등진 것이다. 농사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다는 속임수 이민정책에 빠져 북만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고향을 떠날 때 씨앗과 경작하던 논밭의 흙을 몇 움큼 담아가지고 간다.
만리타향에 정착해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 전에 그 흙을 밭 네 귀퉁이에 뿌려 고향을 옮겨놓는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고향을 옛 고구려 조상의 땅에 다시 세워보자는 뜻이다. 1926년 11월 원산을 통과한 이주동포는 940여호 2천여명이었다. 그들은 매호 평균 81원씩을 가지고 갔을 뿐이니, 말 그대로 맨 주먹이었다.
철원 이북 함경도 땅에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많은 까닭도 밤 열차를 탄 그들을 보며 느끼는 민족적·사회적 분노 때문이기도 했다. 북행열차를 탈 때마다 봐왔던 그러한 서글픈 풍경은 조선이 식민지라는 사실을 각성시켰던 셈이다.
현재 전철이 의정부에서 동두천까지 연장되었다. 따라서 현재 경원선은 연천의 종착역 신탄리역에서 동두천까지만 운행되고 있다. 연천 신탄리역에서 철원역을 가는 철길에 서로 다른 교각을 만나게 된다. 강원도와 경기도를 경계짓는 조그만 실개천 위로.
이는 차탄천 상류로 연천 부거리와 철원 율리리 사이에 경원선 기차가 다니던 다리와 경원선 복선을 위해 건설하던 또 다른 다리들이다. 한국전쟁 이후 끊어진 경원선으로 하여 상판이 없는 교각으로 을씨년스럽게 서로를 위로하며 서 있다.
전쟁물자 수송과 관광객 편의를 위해 경원선 복선을 위해 뚫다만 터널은 역고드름의 신비로운 모습으로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한동민 수원시 화성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