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학교가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나온 삼국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얻은 수많은 판본 중 인천의 입장에서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인천출신 갈홍기(葛弘基)가 번역자로 돼 있는 삼성문화사 판본이 나타난 것이다. 이 판본은 1983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총 7권으로 나왔다.
삼국지를 쓴 수많은 사람 중 인천사람을 찾기가 그렇게 어려웠는데 드디어 나온 것이다.
1906년 강화에서 태어나 1989년에 세상을 떠난 갈홍기는 우리 근현대사의 한복판에 늘 있었다. 역사적 평가를 보면 그는 청년시절 전도유망한 미국유학생으로, 대학교수로 또 대표적 친일 기독교인으로,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으로 다양한 궤적의 삶을 살았다.
이 갈홍기를 '인천 인물'로 취재하면 어떻겠느냐고 연구자들에게 물으니 대답은 엇갈렸다. 그의 이미지가 너무 부정적이어서 되겠느냐는 쪽과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라도 다룰 필요가 있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많은 고민 끝에 싣기로 방향을 잡았다.
갈홍기는 청년기인 1937년 전까지만 해도 인천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색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인천에서 발행된 잡지에서 드러난다.
1937년 1월 인천에서 나온 잡지 '월미(月尾)' 창간호엔 '대(大)인천의 인물은 누구 누구?'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여기에선 몇 안되는 인물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중 갈홍기도 나온다.
"이 글을 쓰려 할 때에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인천 속의 인천'이란 좁은 의미 보다도 '조선 안에 인천'이란 넓은 범위로 보아서 깜박 잊어서는 안될 인물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몇 해 전까지 신문지상에 굉장히 소개되고 있던 '세계적 발명가' 이성원(李盛園)씨! 좁은 인천에서 조선의 중앙무대인 경성(서울)으로 진출하였으나 업적부진으로 영락(零落)하게 되자 벌써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심히 한심한 노릇이다. 이와 반대로 조선 여성의 최고교육기관인 이화전문학교의 부교장으로 그 뇌명(雷名)이 천하에 떨치고 있는 김활란씨가 인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있을 것이요. 같은 교문 내에 이화보육학감으로 계신 서은숙씨도 역시 여성인천의 대표적 선진(先進)이시다. 거기서 한 고개 넘어서 연희전문학교로 가면 청년박사 갈홍기 교수를 뵐 수 있다. 씨(氏)는 인천의 원로 갈형대씨의 아드님이시다."
갈홍기는 분명히 당시 인천이 기대하는 유명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8년 무렵부터 그의 행적은 친일로 기운다. 그 해 6월 6일 인천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되는데 갈홍기는 여기서 서무 직책을 담당했다. 그 후 1943년 11월 6일 전선(全鮮)종교단체협의회가 학병 독려를 위한 조선종교전시보국회를 결성하고 감리교, 구세군, 불교, 장로교, 천도교, 천주교의 대표를 선출할 때 갈홍기는 이동욱 목사와 함께 감리교 대표로 선정됐다.
조선종교전시보국회는 11월 16~17일 이틀 동안 지방도시를 순회하면서 학병독려 활동을 펼쳤고, 갈홍기는 함흥과 청진에서 강연했다고 한다. 일제는 특히 1944년에 접어들면서 교역자들의 정신을 일본화하기 위한 시책으로 연성회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했는데, 감리교는 이미 1943년 8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교파 이름을 개칭했다.
이 새로운 교단조직이 만들어졌을 때 갈홍기는 연성국장이란 직책으로 연성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연성(鍊成)의 목적은 목사들에게 일본 정신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감리교회사'에서 드러난다.
목사로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에 충실했던 갈홍기는 해방직후엔 이승만 정권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갈홍기가 목사가 된 것은 그의 부친 때문이다. 그의 부친 갈형대는 항일운동가인 이동휘와 함께 강화에서 교육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그는 강화보창학교, 통진의 분양학교 설립에 앞장섰다고 전해진다. 교육자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갈홍기는 1925년 배재고등보통학교, 192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했고, 1934년 시카고대학 신학과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이후 귀국해 모교인 연희전문의 교수가 됐다. 이 때 그는 성서, 교육학, 철학개론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교육자였던 부친이 그를 최고의 교육환경에 두었고 유학을 통해 신학을 접하게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대표적 종교인 자격으로 일제의 정책에 충실하게 된 기틀은 어이없게도 태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1941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불과 2년 만에 일약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의 연성국장의 지위에 까지 올라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그는 이승만 정권에 붙는다. 숙명여자대학의 문학부장으로 있던 1948년 그는 외무부 비서실장으로, 1951년엔 주일 대표부 참사관으로 일했다. 이듬해엔 외무부 차관으로, 공보처장으로 정권 핵심부 자리에도 올랐다. 그의 이후 행적은 공보처장 취임사에 밝혔듯이 '정부의 충실한 대변인' 그 자체였다.
그는 또 박정희 정권에서도 여전히 실세로 행세했다. 1966년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냈고, 1973년엔 1966년 서울에서 창립된 아스팍(Asia and Pacific Council) 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도 맡았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살았는데, 이 때의 행적은 확실치 않다. 그는 1989년 8월 25일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조선일보는 1989년 8월 30일자 1단기사로 전했다.
김흥수 목원대 교수는 "갈홍기는 일제 말기에는 일본을 위해 충실히 헌신했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대변인 노릇을 충실히 했고, 생애 말년에는 박정희 정부를 위해 신실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갈홍기 연구 글에서 밝히고 있다.
갈홍기는 또 이승만 정권의 공보실장 자리에 있으면서 '월남 이상재 선생 약전'(1956)과 '대통령 이승만 박사 약전'(1955) 등 두 권의 책을 썼다. 그가 말년에 삼국지를 쓴 대목과 이상재 선생 약전을 쓴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인하대의 삼국지 연구에 참여했던 윤진현(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박사는 "삼국지는 종종 유비 삼형제의 투철한 신의와 형제애에 기대어 역자 자신의 행적과 명분을 변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목되기도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말년의 갈홍기가 자신을 위한 변명의 텍스트로 삼국지를 삼고, 여기에 이름을 얹어 출판을 성사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친일행적에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하수인으로 비난 받아 온 그가 새로 드러난 '삼국지 베끼기'로 다시한번 수모를 겪어야 할 지경에 놓인 것이다.
윤 박사는 또 "젊은 시절의 실력과 기대에 부응해 역사에서도 그 이름을 인정받는 인간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일제와 이승만 독재권력에 부역하며 승승장구해 온 그의 인생을 돌이켜 볼 때, 단지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에 의미를 두던 옛사람들의 경계가 새로울 뿐"이라고 덧붙였다.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