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탄강철교와 전곡읍전경.
   67. 삼방로 > 6 < - 18C중엽 상품유통로

▲ 삼방로 위성사진. 삼방로와 나란히 부설된 경원선철도
   애초에 관방시설을 갖추고 군사로로 이용하려는 목적때문에 조선의 중앙정부는 일반인들의 삼방로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함경도에서 추가령을 넘어 평강~연천~대탄~양주로 연결되는 삼방로는 좌우로 험한 절벽이 이어지기는 하나 철령을 넘어 회양~금성~김화~철원~포천~양주로 이어지는 경흥로보다 60리 정도 짧고, 추가령 자체가 철령보다 낮기 때문에 특히 상인들은 이 삼방로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에 오솔길에 불과했던 삼방로는 점차 평탄화 과정을 거쳐 대로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노변에 새로운 상업취락이 형성되자 중앙정부에서도 더이상 삼방로를 폐쇄하자는 주장을 피력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중앙정부는 삼방로의 통행을 인정하고 대신 삼방로 남쪽의 분수령 일대를 방어기지로 강화하는 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18세기 중엽에 삼방로는 이미 상품유통로로 자리를 잡았고 새로 관방대책까지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조대에 삼방로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을 때에도 폐쇄가 불가하다는 쪽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때 양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관원들이 내세운 근거는 '이 길이 서울, 개성, 황해도로 가는 상인들의 주된 교통로이며 이미 길을 따라 점촌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폐쇄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삼방로가 조선의 동북 교통로의 일축을 형성하자 18세기 후반 이후 제작된 고지도에는 경흥로(철령로)와 함께 삼방로가 표시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중반에 김정호 역시 이를 간과하지 않고, 그가 제작한 '동여도'에서 삼방로의 자태를 뚜렷하게 표시하였으며, 노변에 형성된 상방(上防), 중방(中防), 하방(下防) 등의 노변시설 및 상업 취락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철도중단점앞 선로위에 통일을 염원하는 글귀들이 가득하다.
   삼방로가 특히 중시된데에는 원산과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북어상(北魚商)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원산에서 북어를 수레나 등짐을 이용하여 삼방로를 따라 내려온후 현재의 의정부시 호원동에 위치했던 서울 동북부의 유통거점이었던 누원(樓院)까지 운반해 왔다. 이들은 누원에 도착시각이 언제이든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이는 서울 시내의 북어 시세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삼방로 북어는 시장 규모가 컸으며, 서울 시내의 시세가 좋지 않을 때에는 중간상인과 결탁하여 도성밖의 대장이었던 광주 송파장으로 판로를 바꾸는 사례도 여러 사료에서 발견된다.

   북어는 조선 후기에 소비가 급증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북어가 주요 제수품목으로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제상(祭床)에 육고기와 더불어 바닷고기를 올리는 풍습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으나, 생물은 신선도 유지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진설이 쉽지 않았다. 이때 장기 보관이 가능한 마른 북어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사시사철 구매가 가능해졌고, 이점이 북어의 소비를 크게 자극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은 조선 후기에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건어물류 분야에서 북어의 생산이라는 쇄신이 일어났고, 또한 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조선 후기에 크게 늘어났던 시대적 정황도 서로 잘 맞아떨어진다.

▲ 영화촬영기념표지판. 경원선 접적지역내 몇몇 역들이 영화촬영 등 테마 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삼방로가 상업로로 중시되면서 경기도내에서도 노변의 장시가 활성화되었고, 장시망은 임진강 수운과 연계되기도 하였다. 19세기 초반의 자료인 '임원십육지'에 따르면, 임진강 유역에는 경기도 전체 장시의 4분의1에 해당하는 23기(基)의 장시가 개설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물은담, 송우, 가라비, 신천, 입암, 원기, 동도천장 등의 7기 장시가 수운에 의한 운송체계에서 약간 벗어났을 뿐 나머지 장은 모두 선박을 이용해 상품을 조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 7기의 장시도 경흥로와 삼방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로와의 긴밀한 상관성을 잘 나타낸다.

   즉 송우장과 영평장, 물은담장은 경흥로변에, 그리고 신천장과 동두천장은 삼방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라비장은 양주~적성간, 입압장은 양주~마전간 삼방로 분기로변에 위치한다. 의정부는 경흥로와 삼방간로가 만나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그럼에도 의정부에는 1920년대초에 비로소 장시가 설립되는데, 이는 서울과 동북방향의 상권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 유통거점인 누원이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 수도권전철이 동두천까지 복선으로 준공되면서 지행역 등 동두천의 중심부가 새로이 단장됐다.
   한편 20세기 초반에 도입된 철도의 등장은 지역구조를 재편성하기에 충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량의 화물을 원거리까지 빠르고 안전하게 운송함으로써 철도선을 따라 새로운 교통 및 상업중심지가 형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도 접근성이 탁월하였기 때문에 상업뿐 아니라 행정, 서비스업, 유통업, 제조업 등이 집적하여 신흥도시의 성장을 유도하기도 했다. 일제는 비록 식민통치책의 일환으로 철도선을 획정하지만, 기존의 지역체계와 교통체계를 무시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이에 경부선은 조선 6대로 중의 제5로인 동래로, 경의선은 제1로인 의주로, 경원선은 제2로의 가장 중요한 분기로인 삼방로, 중앙선은 제3로인 평해로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따라 경원선 연변의 의정부, 동두천, 전곡, 연천 등의 기존 지역내 중심지는 조선 후기 삼방로의 개방 이후 다시한번 지역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들 지역의 성장을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로 기능하고 있다. 한편 삼방리에서도 경원철도가 부설된 직후에는 취락이 별로 눈에 띄지않다가 1970년대에는 약수포 일대와 중삼방 그리고 아랫삼방(삼방리)에 역사와 더불어 취락이 확산된 변화상을 볼 수 있다. 현재에는 중삼방 마을을 중심으로 약수포나 윗삼방의 규모도 커졌으며, 1970년대의 상황에 비해 주변 사면에서의 경지 개간이 꽤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 남북분단의 현실아래 경원선의 종점이 되어버린 신탄리역에 오늘도 많은 행락객들이 오르고 내린다. 용산역에서 이곳 까지는 89㎞이고 원산까지의 남은 거리는 131㎞이다. 사진/조형기전문위원·hyungphoto@naver.com
   경원선은 서울에서 원산까지를 잇는 철도로 건설 당시 삼방 부근의 해발 600m 고지가 최대 난코스였다. 이 철도는 러일전쟁 이후 군사상 필요성이 크게 부각됨에 따라 1905년 11월에 기공식을 갖고 근 9년동안의 공기를 거쳐 1914년 9월에 전구간 개통되었다. 이른바 X자형 철도망 구축이 이로써 완성되었지만, 지금은 일부 전철화 구간을 포함하여 서울에서 연천군 신탄리역까지 89㎞만 운행되고 있다. 향후 통일조국에서는 경원선은 함경도를 잇는 간선철도로 정비될 것이며 삼방로 역시 전구간은 어렵겠지만, 경부고속도가 동래로에 대해서 그랬듯이 일부 구간은 고속도로에 자리를 내줄 것으로 예상된다.

   삼방로는 원산에서 함흥, 청진, 나진은 물론, 더 나아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계되는 간선교통로의 남북축을 담당할 것이며, 원산에서는 지금의 7번 국도 및 동해고속도로와도 연계될 것이다. 한편 경원선 철도 역시 지금은 끊어진 동해철도북부선과도 접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래저래 삼방로는 의주로와 더불어 통일 이후 국토 개발의 양대축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김종혁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