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무더웠던 날씨 만큼 우리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이야기 중 하나가 '바다이야기'였다. 바다이야기를 횟집으로 알 정도로 관심없던 사람들도 이제는 바다이야기하면 사행성 게임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다.

바다이야기 도박이 주춤하는 사이 또다른 사행성 게임인 경마, 경륜, 카지노 등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시행되고 있다. 이들 사행사업은 이제는 본장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장외지점을 만들어 서민들의 지갑을 노리고 있다. 특히 경륜은 광명돔에서만 베팅을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서울 등 17개 장외지점 등을 합쳐 하루 평균적으로 3만5천여명이 즐기고 있다. 이중 경인지역에는 광명 본장을 포함해 7개(수원, 일산, 분당, 인천, 시흥, 부천, 산본)의 장외지점이 있다. 사행사업의 하나인 경륜 장외지점과 광명돔 경륜장을 직접 찾아가 봤다. <편집자주>

봄을 재촉하는 겨울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시는 가운데 지난 2일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대원플라자에 자리잡은 경륜 수원 장외지점.

경륜 수원지점은 1997년 3월 개장해 약 2천명을 수용할 수 있고, 건물 4층과 5층을 경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평일(금요일) 이른시간(낮 12시)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4층에 도착했을 때는 좌석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예상지를 보면서 각자 대박의 꿈을 찾고 있었다. 좌석 주변에 젊은 사람들과 여성들이 많이 있는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모(42·장안구 정자동)씨는 "처음에는 재미로 이곳을 찾았는데 이제는 주말이면 이곳을 매일 찾고 있다"며 "경륜이 그린스포츠라고 하는데 웃기는 얘기다. 경륜은 도박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광명돔에서 개최되는 경기와 배당을 볼 수 있었다. 김씨는 30분 정도 예상지 책을 보며 고민하다 3만원을 쌍승식(1등과 2등을 순서에 맞게 맞추는 방식)에 베팅했다. 김씨의 최종배당률은 8.1배. 적중하면 24만3천원을 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적중하면 한번에 20만원을 넘게 벌 수 있으니 사람들이 열광할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후 2시10분 첫 경주가 시작됐다. 김씨의 모든 시선은 대형 스크린에 고정돼 있었다. 마지막 한 바퀴가 남았다는 아나운서의 말이 스크린을 통해 들려오면서 주변에서도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김씨도 혼잣말로 계속 중얼거리며 고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래 잘한다. 그렇지." "좋아 그대로 들어와라." 여기저기서 고객들의 함성에 장외지점은 순식간에 긴장감이 돌면서 소란스러워졌다.

고객들의 간절한 소망을 뒤로 하고 경주가 끝났다. 주변에서는 맞춘 기쁨과 아쉬움의 목소리가 건물에 크게 메아리쳤다. 적중한 사람보다 못 맞춘 사람이 더 많은 듯 이곳저곳에서 욕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김씨도 적중하지 못했는지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김씨는 "1등으로 예상한 선수가 2등으로 들어와서 꽝이다"라며 연거푸 욕을 해댔다. 한 경주가 끝나자 고객들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구매권을 휴지조각처럼 버리기 시작했다.

김씨 옆에서 자꾸 물어보기가 민망해 5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5층은 4층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양모(30·권선구 권선동)씨는 "대학교 때 경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경륜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로 경륜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빠져나올 수 없었다"며 "부모님은 지금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양씨는 자신뿐만 아니라 젊은 또래의 친구들도 경륜을 많이 한다고 밝혔다. 양씨는 금, 토, 일요일 1주일에 세번 경륜장을 찾고 있는 경륜중독증환자라고 스스로 밝혔다.

양씨와 얘기를 하는 사이 5경주 발매 마감 2분 전을 알리는 직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고객들은 서둘러 구매권을 또 구입하기 시작했다. 양씨는 고배당을 노린다면서 60.5배당에 쌍승식으로 5천원을 구매했다. 양씨는 경륜으로 한달에 평균 40만원 이상은 잃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운 좋은 날은 돈을 따기도 하지만, 이 돈은 결국 다음날 다 잃는다"며 "경륜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기자가 고배당보다는 안전하게 2.6배 저배당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하니까, 양씨는 앞의 4경주에서 5만원을 잃었기 때문에 한번에 만회하기 위해서는 고배당을 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도 물론 적중될 확률이 낮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했다.

5경주가 시작되자 고객들의 시선은 역시 스크린을 응시했다. 모두 집단 체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한 곳을 응시하는 게 신기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역시 흥분하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양씨도 두손을 모으고 스크린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자 주위에서 아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양씨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된 채 한참을 스크린을 응시하더니 구매권을 찢어버렸다. 양씨는 "역시 고배당 맞추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며 "다음 경주는 고배당이 나올 가능성이 커 보인다"며 예상지 책을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씨의 희망과는 달리 다음 경주에서도 고배당은 터지지 않았다. 양씨의 구매권은 또다시 휴지가 돼 버렸다.

6경주가 끝나자 은행자동인출기에서 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윤모(50)씨는 "가져온 돈 10만원을 모두 잃어 통장에서 돈을 찾고 있다"며 "더이상 돈을 찾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박을 꿈꾸며 장외지점을 찾은 사람들이 한 경주가 끝날 때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지는 것을 보면서 경륜으로 돈을 버는 건 '뜬구름' 잡는 거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하늘이 맑은 가운데 3일 오전 광명시 광명돔 경륜장. 오늘은 장외지점이 아닌 경륜장을 직접 찾았다.

광명돔 경륜장에 도착하니 동양최대 돔 경륜장(지상 5층, 3만여명 수용)답게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광명돔 경륜장은 3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2층 출입문 입구에서는 예상지 기자들의 경주 예상평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치듯 많은 사람들이 전문가의 의견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있었다.

 
 
 
선모(40·여)씨는 "경륜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잘 모르기 때문에 예상지 기자의 평을 꼭 듣는다"며 "지난주 전문가의 말을 듣고 베팅해 4만원을 벌었다"고 자랑했다.

이모(42)씨는 "경륜이 시작하는 날은 늘 이렇게 일찍와 예상지로 공부하고 있다"며 "수· 목요일에는 경정장, 금·토요일에는 경륜장, 일요일에는 과천 경마장을 가고 있다. 1주일에 5일은 도박에 빠져 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편 경륜운영본부는 지난해 6월 9일부터 1경주 베팅 한도액을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상향조정했으며 경주수도 창원경륜의 교차투표 4경주까지 합쳐 18경주를 구매할 수 있게 하는 등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베팅액'과 '경주횟수'를 늘려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고 있다. 고객들은 경륜운영본부가 계속되는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교차투표까지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경륜운영본부관계자는 "동종업종인 경마 운영자측(KRA)과의 형평성과 고객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한도액을 올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경륜 매출액은 2002년 2조2천890억원에서 2003년에는 18.8% 감소한 1조8천690억원, 2004년에는 19.8% 감소한 1조4천980억원, 2005년에는 11.9% 감소한 1조3천180억원으로 매출액이 점차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륜이 계속 감소세를 보이는 것은 내수 침체가 이어진데다 접근성이 용이하고 24시간 즐길 수 있는 '바다이야기' 등 불법 도박으로 사람들이 발길을 돌렸기 때문으로 한국레저산업연구소는 보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바다이야기'에 철퇴가 가해지면서 게임 이용자들이 경륜으로 많이 옮긴 것으로 나타났다. 경륜의 작년 매출액은 1조7천721억원으로 전년도에 비해 5.3% 증가했다.

장외지점에서도 느꼈지만 이곳 광명돔 역시 주부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제 사행사업이 젊은층과 여성들에게 깊이 침투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드디어 경주발매가 시작됐다. 한 남성이 같은 자리에서 30만원을 구매하는 등 한도액을 넘어서 베팅하는 고객들이 매표 창구마다 많았지만 운영본부의 제지는 어느 한 곳에서도 목격되지 않았다.

경륜장 매표소 직원은 "한도액을 지키기 위해 발매원 교육 등을 철저히 시키고 있지만 고객들이 화를 내면서 더 찍어달라고 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기자도 2경주에 쌍승식(1-5) 1만원을 베팅했다. 직접 경주권을 구매하니 고객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발매 마감 8분이 남았다는 시그널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힘차게 울리면서 사람들의 발길도 매표소로 분주히 향했다.

마감 5분 전, 3분 전, 2분 전, 1분 전…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구매한 선수들이 들어올 수 있을까? 안 되면 어떡하지? 등등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진다. "그래 운에 맡기자."

경기가 시작됐다.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선수들이 자전거에 속력을 붙이면서 내 심장도 빨리 뛰기 시작했다. 문득 이래서 이런 사행사업에 사람들이 빠져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사람들의 함성속에 경기가 끝이 났다. 결과는 5-1. 이런, 복승식(순위에 상관없이 1, 2등만 적중시키는 방식)을 했으면 적중하는건데 괜히 쌍승식을 해서…너무나 아쉬웠다. 주위 곳곳에서 적중의 기쁜 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그 순간은 부러웠다.

오후 7시40분 마지막 경주가 끝나자 경륜장을 찾았던 사람들은 '내일은 꼭 적중시켜 대박을 내겠다'는 꿈을 가지고 하나둘씩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바다이야기'는 조용해졌지만 또다른 '바다이야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실감한 이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