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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월산성에서 바라본 경흥로길. 경흥로는 한양에서 함경도 서수라까지 총 길이 2천190리 길이다. 의정부와 양주·포천읍을 거쳐 포천천을 따라 북상하는 길은 영평천을 만나 백운 계곡을 옆으로 강원도로 향한다. 사진/조형기전문위원·hyungphoto@naver.com | ||
의주로를 통일로로 부르는 것에 대하여 경흥로는 오늘날 호국로(護國路)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3번 국도 및 43번 국도가 옛 노선을 거의 대부분 계승하였다.
경흥로는 지질·지형조건과 관련하여 옛 큰길 가운데 노선의 변경이 가장 적다. 삼방로가 연천에서 내려오는 지질구조선을 따라 놓인 것처럼 경흥로 역시 동북방향으로 뻗은 큰 지질구조선 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구조선은 하천을 유도하고, 하천은 범람과 곡류를 반복하면서 연안에 좁고 긴 충적지를 형성시킨다.
또한 충적지는 기복과 경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길로 이용된다. 결국 좁고 긴 하곡을 따라 놓인 경흥로는 새로운 노선이 모색될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우선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1864)'에는 경흥로 노선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도-수유현(15)-누원(17)-의정부(8)-서오랑점(10)-축석령(10)-송우장(20)-파발막(10)-안기역(10)-탄장거리(10)-만세교(10)-양문역(10)-유정(10)-굴운천(10)-서수라.
누원(다락원)은 서울시와 의정부시 경계 지점의 3번 국도 서쪽편 안쪽, 행정구역상으로는 의정부시 호원동에 위치한다. 조선후기에 누원은 송파와 더불어 서울 주변 큰 시장의 하나였다. 특히 동북지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북어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한때 서울의 시전상업을 위협할 정도로 활발한 유통거점이었다.
원산 등지의 동해안에서 생산된 북어를 싣고 오는 상인들은 누원에 도착한 시각이 언제이든 서울의 어물시세를 파악하기 위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한다. 또한 어물유통에 참여하고 있었던 한성부 내의 이현(梨峴),칠패(七牌) 시장의 중간상인들은 개별적으로 누원에 가서 어물을 도집한 후 이를 어물전에 넘기지 않고 행상들에게 직접 판매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남기기도 하였다.
경흥로는 의정부 시가지가 시작되는 초입에서 43번 국도로 이어진다. 서오랑점은 이 국도변에 위치한 취락으로 현 금오동에 해당한다. 지금은 주변에 경기도제2청사가 들어서면서 대단위 아파트단지와 더불어 시가지가 크게 조성되었다. 의정부와 포천의 경계를 이루고, 한강과 임진강의 분수계인 한북정맥 위에 놓인 축석령 고갯길은 옛 노선의 일부를 그대로 남겨 놓은 채 직선화와 더불어 도로폭 확장이 이루어졌다. 4·9장인 송우장은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에 있는데, 지금도 읍내 안쪽 도로변에 5일장이 열리고 있다. 장터가 남아있는 곳이 흔치 않은 상황에서, 송우장은 한술 더 떠 장터 입구를 막고 있던 건물을 작년에 철거하면서 시원해졌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장이 서지 않는 날에 송우장터는 주차장으로 이용된다. 송우장은 1970년대 초에 소멸한 쇠전이 유명했는데 쇠전터는 시가지 밖 동쪽 하송우리 포천천변 둔치에 있었다. 소를 묶어 놓으려면 비교적 넓은 개활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쇠전이 천변 둔치에서 열리는 모습은 전국적으로 볼 수 있었다.
경흥로는 두 개의 큰 지선이 있었다. 하나가 지난번 주제로 다루었던 삼방로이고, 다른 하나가 양주 비립거리에서 적성까지 이어지는 적성로이다. 이 길의 경로는 다음과 같다.
비립거리-<양주> (10)-가라비장(10)-상수역(20)-광수원(10)-설마치(5)- <적성> (15)
양주 치소는 양주시 유양동에 있었고, 가라비장은 조선후기 이래로 지금까지 장이 열리는 유서 깊은 5일장으로 광적면 가납리에 있다. 가납리에서 적성로는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39번 지방도로로 계승되고, 남면 경신리 비석거리에서 서쪽 길, 즉 323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어 상수역이 있던 상수리 역말로 이어진다. 광수원은 남면 신암리에 있던 원이고, 계속해서 323번 도로를 따라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쪽으로 향해 난 계곡을 따라 오르면 설마치를 넘는다. 적성 치소는 적성면 구읍리, 중성산 동편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한국 전쟁 때 취락이 소실되고 지금은 향교만이 옛 정취를 살짝 풍겨준다.
이밖에 경흥로는 파발막에서 포천 읍치(邑治)까지와 만세교에서 영평 읍치까지의 각기 10리길에 불과한 짧은 두 개의 지선이 더 있었다. 조선시대에 포천 관아가 있던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였다.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도 두 지점 사이의 길이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일제시기 지형도 등을 참고하면 파발막에서 포천천을 건너 감바위~벌말~가리피~용정리까지 논길을 따라 이어진 후 작은 고개 두 개를 넘어 새말(신촌)에서 구읍리의 서부마을과 동부마을로 이어진 듯하다. 구읍리에서 현 포천시의 중심지를 이루는 포천동으로 군청이 옮겨간 것은 1905년이었다.
한편 영평(永平)은 1914년에 포천군에 병합되는데, 영중면ㆍ영북면ㆍ일동면ㆍ이동면 등이 원래 영평 땅이었다. 영평의 치소는 영중면 영평리에 있었으므로, 만세교에서 영평으로 이어지는 최단 노선은 거사리와 영송리를 경유한 후 영평천을 건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선보다는 경흥로 본선을 따라 올라가다가 양문역을 조금 지난 새장터(신장리)에서 서쪽으로 빠지는 길이 더 수월해 보인다. 이 분기로 역시 짧은 노선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노선이었든지 의미에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종혁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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