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 시작까진 1시간이 넘게 남았지만 송태옥(83·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선생은 리허설이 한창인 공연장 텅빈 객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물끄러미 무대 위 연주자들을 응시하는 송 선생의 눈동자에 잠시 이슬이 스쳤다. 그때 바이올린을 켜던 한 연주자가 송 선생을 발견하고 객석으로 달려나왔다. "선생님 아니세요? 건강하신거죠?" 송 선생의 손을 맞잡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얼굴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송 선생은 25년 전인 1982년 수원시립교향악단을 창단한 뒤 4년간 초대지휘자를 지냈다. 이 바이올리니스트는 그가 지휘자였을 때 데리고 있던 단원 중 한 명. 현재 시립교향악단에는 그와 함께 했던 단원이 두 세 명 남아 있다.
"그럼 잘 지내고 있지. 아직도 나를 기억해주니 고맙네." 송 선생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송 선생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음악인이었다. 수원시립교향악단에 앞서 1964년 수원음악협회를 만든 뒤 10여년간 초대지부장을 지냈다.
수원예총 발족도 그가 주도했다. 경기도합창단과 난파합창단, 수원시어머니회 등 그가 지휘자로 나선 단체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송 선생이 매년 빠지지 않고 챙기는 게 바로 이날 열린 창단기념 연주회. 그의 자리는 언젠가부터 무대가 아닌 객석이다.
송 선생은 "수원시립교향악단이 교향악의 하모니를 제대로 내는 게 기쁘다"면서 "앞으로 베를린필이나 뉴욕필, 비엔나필처럼 세계 정상의 교향악단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송 선생은 음악인으로 활동하면서도 38년간 교직에 몸담았다. 그는 1984년 명예퇴직을 하며 퇴직금 중 일부를 마지막 학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현재까지 그 학교에는 '지은(知恩) 장학금'이란 이름으로 그의 흔적이 내려오고 있다.
송 선생은 "명예퇴직을 선택한 건 겸직을 할 수 없는 직책에 올라가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며 "장학금 이름을 '지은'이라고 붙인 건 한 살 때 백혈병으로 죽은 내 딸아이의 이름이라서"라고 말했다.
2003년 송 선생은 80에 접어든 나이로 중국어라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최고령 입학이란 수식어와 함께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2학년으로 편입했다. 그 뒤 4년. 그는 당당히 졸업장을 움켜쥐었다. 최고령 입학에 이은 최고령 졸업이다.
송 선생은 "한자에는 자신있었지만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까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해 하루 4시간 정도만 자면서 공부해야 했다"며 "함께 스터디그룹을 했던 동기들이 없었다면 아마 벌써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동기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방통대 2006학년도 학위수여식에서 그는 또 하나의 기록을 남겼다. 1만명이 넘게 운집한 졸업식에서 방통대 관현악단이 교가를 연주할 때 지휘를 맡아 노익장을 과시했다.
송 선생은 "중국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고, 우리 음악도 중국에 가르쳐주고 싶다"며 "얼마 남지 않았겠지만 그날까지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