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오는 길목'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 쓰는 말이다. 그 중 공간으로 본다면 우리의 답사는 봄을 북쪽으로 가져다준 꼴이다. 봄은 당연히 남쪽부터 올진대 우리는 북으로 난 경흥로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경흥로를 따라 올라갈수록 잔설이 많고 더 추웠던 것도 이 봄에 겨울을 경험한 추억이다.
축석고개 현충탑과 전적비를 두루 살펴보고 포천 소흘읍 송우리에 당도한다. '솔모루길'이라는 안내판이 정겹다. 솔모루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왜 굳이 송우라고 했을까? 그나마 '솔모루' 입구에 새로운 솔밭공원을 조성하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대형 할인매장이 새 솔밭 옆에 단장을 하지 않는가. 그 옛날 번성했던 솔모루 장은 이제 더 뒤로 밀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포천천 따라 올라가는 경흥로, 옛 파발막 옆 자작동에 고인돌이 있다. 크기도 만만치 않고 조형미도 좋아서 환영을 받는 고인돌이다. 더구나 경흥로를 계승한 43번국도 옆인지라 찾기도 쉽다. 고인돌 시대에도 경흥로까지는 아니어도 이 길을 어느 정도는 사용했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합리는 단순하기 때문이다. 가깝고 다니기 좋으면 길이 되는 것 아닌가.
지금의 포천시청은 포천천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지만 옛 포천의 중심은 천변에서 벗어난 청성산(반월산) 아래가 터전이었다. 군내면 사무소가 그 자리일 터인데 오랜 세월 포천을 다스린 읍치소이다. 청성산의 반월산성이 그를 증명하는 셈이다. 반월산성은 작지만 조망만큼은 어느 산성에도 뒤지지 않아서 포천 일대를 충분히 지키고도 남는다.
이런 지리적 요충지에 설마 불교 유적이 없겠는가? 군내면 사무소 아래에 선 커다란 미륵이 옛길을 증언한다. 4.5가량 되는 큰 키에 후덕하면서도 위엄을 드러낸 모습에서 고려시대 불교의 한 단면이 보인다. 다만 지금 법당의 실내가 좁고 낮은 것이 흠이다. 미륵불의 입장에서 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으리라. 또한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훼손된 부분도 성형수술로 옛 모습 비슷하게 살려놓았다. 그렇다고 부처님의 공덕이 깎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불성이 한 자락이라도 들었으니까.
다시 43번국도 경흥로를 따라 오르면 신북면 기지리에 이른다. 1948년 남북이 으르렁거릴 때 만든 콘크리트 진지가 하나 남았다. 두께가 1는 되어 보이는데 바깥쪽은 많이 깨져서 흉물스럽지만 안에 들어가면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요새로서 손색이 없다. 오가는 자동차의 행렬이 분주하지만 어느 차가 얼마만큼 달리는지 다 보인다.
이 기지리에서 태어난 큰 인물은 단연 봉래 양사언(1517~1584) 선생이다. 여덟 고을을 다스린 선정가로도 유명하고, 가는 곳마다 절경을 찾아내 음풍농월하였으며, 특히 금강산을 예찬한 인물 가운데 으뜸이다.
금강산 만폭동(萬瀑洞)바위에 봉래풍악(蓬萊楓岳), 원화동천(元化洞天) 여덟 글자를 크게 쓰고 새겼다. 아직은 우리가 가지 못하는 내금강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 조에, 중국 사신들이 왜 금강산을 찾느냐는 임금의 물음에 재상이었던 하륜이 중국인들의 말을 빌어서 한 말은 금강을 대변한다.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직접 보았으면…(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
그러고 보니 경흥로는 서울에서 금강산 가는 길이기도 하다. 휘적휘적 한 발 한 발 걸어서 금강산 가는 길, 주변의 산천경개도 보고 사람들의 생활상도 보면서 가는 유람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만 돌아가는 요즘의 정서로는 헤아리기 어렵겠지만 가치는 훨씬 높았으리라. 양사언 선생의 묘는 일동면 길명리에 썼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무엇이든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가르침을 주는 양사언 선생의 시조 아닌가. 더구나 포천의 금수정 강변에 새긴 암각 글씨도 양사언 선생의 필적이라 하니 그 사랑과 풍류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기지리에서 계속 올라가면 만세교를 만나고 이내 38선을 넘어 영북면을 지나면 강원도 철원이다. 남북 분단으로 옛 철원을 떠나 새롭게 자리잡은 신철원, 군청에서 5리 남짓한 거리에 삼부연폭포가 있어 발길을 잡는다.
'철원읍지'에, "용화산에 있다. 뭇 시내가 뒤섞여 모여 끝으로 갈수록 깊고 점점 커지다가 석벽에 거꾸로 걸리면서 문득 3층의 돌구덩이를 만들었다. 그 깊이는 알 수 없는데 모양은 세 개의 가마솥과 같으므로 이름을 그렇게 부른다. 곧 기우처(祈雨處)이다."
높이 20여의 거대 석벽을 타고 내리는 물을 용의 화신으로 보았을까? 아니면 신선이 사는 세계로 느꼈을까? 삼연 김창흡 선생(1653~1722)이 은거지로 정했던 곳이다. 호 역시 삼부연을 따서 삼연이라 했으며, 제자인 겸재 정선(1676~1759)이 금강산을 다녀오면서 삼부연폭포 그림을 그리게 된다. 나중에 스승인 삼연 선생은 그 그림에 제사를 붙인다.
"거대 절벽 검은 못에, 삼급(三級)으로 폭포를 이루었구나. 용은 아래에 숨고, 선비는 위에 깃들었네. 그 덕을 같이 해야 하련만, 끝내 그 이름만 훔쳤을 뿐인가."
폭포 오른쪽의 새로 뚫은 굴을 지나면 삼연 선생이 은거하던 용화촌이 나온다. 또 폭포 아래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전통을 살리려고 하는지 여기저기에 제물로 쓴 과일들이 어지럽다.
삼부연폭포 보느라고 경흥로에서 벗어난 김에 반대로 왼쪽길로 접어들면 승일교며 고석정이며 직탕폭포 같은 명승지가 줄줄이 매달렸다. 더구나 도피안사와 분단의 상징인 노동당사 및 제2땅굴까지. 직탕폭포를 한국의 나이아가라폭포라고 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탄강만이 빚어내는 독특한 폭포임엔 틀림없다. 도피안사의 철불(국보63호)은 또 어떤가? 금칠의 번쩍거림으로 묻혔던 미소가 최근 칠을 벗겨내니 되살아났다.
다시 신철원에서 43번국도를 타고 오르면 토성리가 나온다. 여러 기의 고인돌이 선사시대를 증언한다. 김화 쪽 길을 버리고 계속 북으로 오르면 민통선을 거치게 되면서 제2 땅굴에 다가간다. 이곳엔 서울에서 연천과 옛 철원을 거쳐 금강산으로 다니던 철로가 희미한 흔적으로 남았다.
개울과 강을 건너는 철교는 군데군데 남아서 다시 이어질 날을 고대하는 듯하다. '금강산 가던 철길!' , '끊어진 철길! 금강산 90키로!' 등의 글귀와 느낌표 때문에 가슴이 더욱 아려온다. '끊어진 철길'에서 '끊'자를 떼어내면 '어진 철길'이 될 터인데. 금강산이 90㎞라면 지금은 한 시간도 채 안 걸릴 터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 간다고 신나는 기차 여행을 즐겼을 것인가? 더구나 아직은 가지 못하는 내금강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철교를 지날 때의 투명한 바퀴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다 삭아가는 침목에는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새겨 박은 동판이 반짝거린다. 끊어진 철길과 철교는 '유산'이 될지언정 '분단'이 유산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염상균 역사탐방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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