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흥로는 조선시기에 함경도와 강원도 등 동북지역 일대의 물산을 모아 서남쪽 서울로 넘겨주던 유통로다.
다른 이름으로 동북경흥대로(東北慶興大路), 통북대로(通北大路) 북관대로(北關大路) 라고 불렀듯이 대로의 면모를 갖춘 길이다.
경기 길 답사는 재작년에 평해로에서 시작하였는데 어느새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이 경흥로에서 일단락 지을 것 같다.
그래서 길의 기능을 정리해 보는데, 이 경흥로만큼 적절한 대상은 없는 것 같다.
통시대의 대로는 관방(關防)과 행정 기능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마패에 그려진 말 숫자대로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역을 곳곳에 설치해 두었다. 대로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상인이나 여행객이 머물 수 있는 주막과 원(院)같은 숙박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유통과 교류의 중추 기능을 담당한다.
경흥로 역시 여러 군상들이 이 길을 따라 이동하였다. 금강산 구경 가는 이에게는 즐거운 유람 길이었지만, 죄를 지어 북쪽 변방으로 유배 가던 이에게는 고통의 귀양길이었다. 관리로 임명받아 부임하던 길이기도 하지만 벼슬살이를 접고 낙귀(樂歸)하던 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경흥로 이용은 사행(私行)도 있었고 관행(官行)도 있었으며 간혹 사행(使行)하던 일행도 이용한 길이었다. 게다가 지로나 협로, 우회로가 별로 없다 보니 이용객이 이 길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대로변은 꽤 많은 여행객과 시설들로 북적대었다.
우리가 조선시대로 돌아가 포천 관내의 경흥로 한 길목을 지킬 수 있다면 이와 같은 길의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포천시는 과거 영평현까지 포섭하고 있어 경흥로가 갖는 다양한 콘텐츠를 거의 모두 담고 있다. 포천시를 흐르는 물의 근원은 둘인데, 하나는 남쪽 축석령에서 나오고, 하나는 동쪽 수원산에서 나온다.

조선의 양반들이 남긴 여행 일기 기록을 보면 숙식 해결방식이 일반 백성들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수당 이남규(1855~1907)가 쓴 '갑오일기'의 한 부분인데, 이러한 면과 함께 축석령에 얽힌 근대사를 만날 수 있다.
"8일 맑음. 아침에 길을 떠나 참봉 이규진의 집에 들러 점심을 먹고, 송산에 들러 정자공과 강릉공 산소에 성묘한 뒤 포천 축석령에서 잤다.
9일 맑음. 송우점(松隅店)에서 아침을 먹고, 자하리에 있는 진사 조언식의 집에 들러 유숙하였다.
10일 맑음. 아침에 길을 떠나 10리를 가니 금수정이 보이는데, 냇물 빛과 나무 색깔이 한가로이 어우러져 자연에 동화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올라가 조망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바빴다. 몹시 아쉬웠다. 영평 신장점(新場店)에서 점심을 먹고, 철원에서 잤다."
갑오년은 1894년, 즉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 해다. 이 해 5월에 일본공사 오도리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까지 밀고 간 일이 있었다. 원산항에서 경흥로를 타고 내려온 것이다. 이남규는 이 일로 상소를 올렸고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흥부사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일본군과 의병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축석고개에서 벌어졌다. 이 고개는 6·25전쟁 때 남북이 대치하다가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기도 하다.
"안기역(安奇驛)은 포천현에 속한 역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백 리쯤이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오는 자는 양주를 지나 반드시 여기에서 유숙한다. 그러나 사신들의 큰 행차는 모두 고을에 들어가고, 여기에 머무는 자는 개인 여행자들이거나 잡스런 빈객들이어서 역을 관장하는 자는 시설유지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눈앞에 닥친 급한 임무에만 힘쓴다. 그래서 이 역이 여러 번 황폐하였어도 수리하지 않았다. 1481년 봄에 내가 채기지(蔡耆之)와 함께 지달산에 가는 중 날이 저물어 이 역에 들러 냇가에서 저녁밥을 먹고 밤에 여관에 드니 집이 기울어져 사람이 잘 수 없고 마굿간도 무너져 말을 재울 수 없었다. 아전에게 물으니, '이는 읍과 가깝기 때문입니다. 읍에 가는 자는 귀한 신분이고, 역에 모이는 자는 낮은 신분입니다. 오직 귀한 분의 꾸지람을 면하고자 할 뿐이지 낮은 자의 폐를 돌아보겠습니까' 하였다."

양문역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능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낚시터 위로 인흥군(仁興君) 영(瑛·1604~1651)의 묘가 있다.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이 1670년에 쓴 기언별집(記言別集) 구묘도기(丘墓圖記)에는 양문역사에서 조금 북으로 올라가면 화덕원(和德原)이 있는데, 높은 비석과 큰 봉분이 인흥군의 무덤이라고 하였다. 1628년에 대북파 잔당 유효립(柳孝立)이 모반을 기도할 때 인성군(仁城君)을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인흥군은 그와 동모제(同母弟)라는 이유로 의심을 받았지만 가담한 증거가 없고 인조 임금의 적극 비호로 무사하였다.
그가 죽었을 때는 병자호란을 겪은 뒤여서 여러 봉군(封君)과 귀신(貴臣)의 장례에 대한 절차를 간소화 하였으나 임금이 망자를 특별히 대우하여 예절을 갖추어 장사 지냈다고 하였는데, 커다란 봉분과 그 앞의 각종 웅장한 석물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의 시호는 효숙(孝肅)이었으나 후에 정효(靖孝)로 개시(改諡)하였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적혀 있는가를 보고 석물의 연대를 파악할 수 있다.
묘 입구에는 신도비가 2기 서있는데, 하나는 1655년에 이경석(1595~1671)이 찬(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부인 여산 송씨(1608~1681)가 죽은 다음 해인 1682년에 다시 만든 것인데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찬한 것이다. 후자에는 비 하방(下防)에 한수재 권상하(1641~1721)가 스승인 우암의 글 중 경전(磬甸)이란 용어 때문에 짓게 된 추기(追記)가 있는데, 1716년에 쓴 것이다.
경전의 경은 목을 매달아 죽인다는 뜻이고, 전은 교야(郊野)를 맡은 관원이다. 왕족을 사형시킬 때는 이를 숨기기 위해 전인(甸人)에게 넘겨 처형한다는 뜻이다. 우암은 신도비명에 인흥군이 역적으로 몰린 형 인성군을 위해 임금께 호소함으로써 인성군이 형벌을 가볍게 받았다는 뜻으로 이 말을 썼는데, 권상하는 추기를 통해 실상은 인조가 신하들의 청에 못 이겨 본의 아니게 인성군을 자결하도록 했을 뿐이므로 경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고, 인성군과 인흥군 두 집안 자손들도 이를 수정해 주기를 청하므로 스승의 문자를 고치지 않고 청을 들어주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택한 것이라고 하였다.

봉분 앞 비도 1682년에 만든 것인데, 미수의 구묘문(丘墓文)에다 송씨의 행적을 추가하여 아들인 낭선군 이우가 쓴 것이다. 이것뿐 아니라 묘역의 모든 석문은 명필로 이름을 날린 이우의 글씨다. 그리고 글들은 이경석, 허목, 송시열, 권상하 등 당대의 유명 학자들이 지었다. 경흥로가 길의 모든 기능을 담고 있는 길박물관이듯이, 이 묘역도 그 자체로 훌륭한 야외역사박물관이다.
/정승모 지역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