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월산성.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청성산에 있으며 전체둘레 1천80로 포천은 물론 주변산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고구려 낭비성으로 추정되며 백제, 고구려, 신라순으로 주인이 바뀔 정도로 한탄강 유역의 군사적 비중이 큰 천혜의 요충지이다. 사진/조형기전문위원·hyungphoto@naver.com
   71. 경흥로 >4< - 서수라로 가는 길

    1.경흥로의 끝, 서수라(西水羅)

   '서수라'라는 이름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있다. 서수라는 독도 등 섬을 제외하고 난 한반도의 동쪽 끝(동경 130도)이요, 우리나라 최북단 어항(漁港)이다.

   아득하여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그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의 설렘을 기억하고 있다. 조선시대 홍길동·임꺽정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적으로 불렸던 장길산 때문이다.

   장길산 세력에 위협을 느낀 숙종은 포도청의 장교를 파견하여 체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그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그는 함경도 두만강 입구에 있는 서수라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알려졌으나, 끝내 잡히지 않았다. 서수라는 그렇게 아득한 미지의 땅으로 각인되었다. 홍길동전의 율도국처럼.

   그러나 서수라는 조선시대에 여진족을 경략하기 위한 서수라보(西水羅堡)가 설치된 국방의 요충지로 조정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이러한 관심은 봉수대 설치를 통해 나타난다.
동북쪽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봉수로는 함북 경흥의 서수라 봉수대로부터 시작하였다. 이 봉수로는 서울로 오는 또 다른 대로(大路)였다.

▲ 호로고루성과 임진강. 호로고루는 고구려 관방유적 가운데 당포성. 은대리성을 포함한 3개의 평지성으로 인근 여울은 임진강에서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첫번째 여울목이다.
   그 길은 예부터 낙랑과 말갈 그리고 여진족이 남하하는 길이었다. 서수라는 그렇게 국경을 향하여 있다. 1895년 연해주로 왕래하는 선박은 반드시 서수라를 경유하여 납세 증명서를 받도록 하였다. 만해 한용운이 연해주에서 일진회원으로 오해되어 죽을 뻔하고 돌아온 곳도 서수라였다.

   경흥로의 경기도 구역은 한성을 수도로 한 백제의 처지에서 보면 사활이 걸린 중요한 길목이었다. 원산만에서 철원평야를 거쳐 한성에 이르는 동북방의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원과 한성을 이어주는 포천지역은 백제 초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포천의 반월산성을 비롯한 많은 산성의 존재가 그것을 알려준다. 북쪽에서 오는 군대를 막는 길은 임진강을 넘어오는 의주로와 동북쪽 삼방로, 경흥로를 막는 일이다.

   2. 임진강 방어선

   평양을 출발한 고구려 대군이 개성을 통과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최단코스는 임진강을 배로 건너 남쪽 문산 방면으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임진강을 배로 건널 수는 없었기에 임진강 북쪽 현재의 322번 지방도를 따라 동북쪽으로 15㎞쯤 우회하여 호로고루 앞 여울목을 건넜다. 배가 닿는 마지막 포구 고랑포 위쪽, 임진강에서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첫번째 여울목이다.

   따라서 임진강을 건넌 군대는 적성을 거쳐 설마치 고개를 넘어 양주를 통해 삼방로와 만나 의정부,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따라서 임진강 방어선이 뚫리면 한양이 위태롭게 되는 까닭에 임진강 남쪽으로 백제의 무수한 성곽들이 축성되었다. 임진강 북쪽 고구려의 호로고루에 맞서 백제는 옥계토성과 칠중성을 쌓았고, 적성 동북쪽으로 아미성·수철성, 서남쪽으로 파평 금파리토성, 문산 임진토성과 한강 입구에 오두산성을 쌓았다. 그리고 남쪽 양주에는 대모산성을 두었다.

   그러나 문산 방면의 의주로보다 동북쪽 삼방로·경흥로에 대한 방비가 더욱 중요하기에 이 지역에 산성들이 집중적으로 축조되었다.
▲ (왼쪽)수철성. 연천군 장단면 원당리에 있으며 건너에 아미성이 보이며 37번 국도가 조망된다. (오른쪽)대모산성. 양주읍에 있으며 양주산성이라고도 불린다.
   3. 반월산성

   경흥로를 타고 오는 북쪽의 세력을 막는 길은 포천 반월산성을 통해 방어하는 것이다. 더욱이 포천의 반월산성을 장악한다면 춘천 방면까지 무방비 상태로 진격이 가능하다. 이는 곧 북한강을 장악한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포천의 반월산성은 한강을 장악하려는 세력과 막으려는 세력에게 천혜의 요충지가 되는 셈이다.

   고구려의 낭비성으로 추정되고 있는 반월산성은 청성산(285m)에 축조된 반월형의 테뫼식 산성이다. 전체 둘레는 1천80로 포천은 물론 인근 지역의 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몇 차례 발굴조사로 반월산성은 처음 백제가 경영하다가 고구려, 신라의 순서로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한강 이북 지역의 역사적 주인공이 바뀌었던 상황과 궤를 같이 한다.

   고구려는 낭비성(반월산성)을 경영하면서 한반도 중부를 석권하였으나 629년 신라에 낭비성을 빼앗기면서 포천지역뿐만 아니라 한탄강 유역을 상실하였다. 낭비성을 확보함으로써 신라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통일을 준비해갔다.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보은의 삼년산성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 것이 포천의 반월산성이라 할 수 있다. 반월산성은 주변 산성의 통제와 보급을 지원하는 중심 성곽이다. 북쪽으로 성동리산성과 고소성이 있고, 남쪽으로 고모리산성이 위치해 있다.

   성동리산성(城東里山城)은 38휴게소 북쪽 약 1㎞ 지점에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마을사람들은 궁예가 축성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기와와 토기 조각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산성이다. 오히려 출토되는 기와조각이 반월산성의 그것보다 옛것이다.

   성동리산성의 남쪽면은 영평천이 감싸며 흘러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산성은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지만 포천과 철원을 연결하는 47번 국도가 산성의 남쪽과 동쪽을 지나고 있다. 따라서 성동리산성은 포천~영평~운천~철원 방면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차단하기 위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고소성(姑蘇城)은 포천~영평~전곡~임진강 방면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기 위한 성곽이고, 고모리산성(古毛里山城)은 포천~광릉~퇴계원~구리~아차산성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고소성은 백제의 고모루성(古牟婁城)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실상 백제의 성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남쪽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기 때문이다. 남쪽과 서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입구와 건물이 북쪽 산록에 위치해 있어 고구려가 경영한 성곽으로 볼 수 있다.

   4. 산성, 역사의 보물창고
▲ 궁예산성. 포천시 관인면 중리 일대에 걸쳐 있으며 보개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철원군에 도읍 했던 태봉왕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며 항전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이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에게 그 역사를 지탱해왔던 실질적인 힘을 묻는다면 단연코 산성에 근거한 전략과 전술을 꼽을 것이다. 산성에 근거한 군사력, 그 힘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광대한 땅과 인구에 입각한 오만한 한족(漢族)의 강역이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수·당의 대군을 물리친 것도 난공불락의 산성들에 있었고, 당나라에 맞선 신라의 전쟁도 산성에 근거한 싸움이었다.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에 끝까지 저항한 것도 포악한 왜적의 임진왜란도 산성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의병(義兵)'의 존재 때문이다.

   대개 출토유물이 고분에서 나오는 부장품 중심의 유물임에 비해 산성에서 출토되는 그것은 다양한 일상의 삶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산성은 그래서 우리 반만년 역사의 자랑이자 보물창고와 같다.

   맑은 날 반월산성에 서면 철원 평야와 서울의 남산타워가 보인다니, 남북을 아우르는 길목이어라.
눈 들어 보이는 산성마다 오르며 서수라, 그곳으로 가고 싶다.

   /한동민 수원시 화성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