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부활절을 맞은 인천 중구 내동 3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대한민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다. 이번 부활절 기념 미사에는 250여명의 신자가 참석했다.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 모이다 보니, 모처럼 만난 사람들은 서로의 안부를 주고 받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17년 전인 18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해군의 군종 사제를 지낸 찰스 존 코프(Charles John Corfe) 주교가 그 해 9월 29일 인천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디디면서부터다.

   코프 주교는 조선 선교의 책임을 맡아 왔던 것이다. 대한성공회 역사는 이렇게 첫 줄이 쓰였다.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들어왔으니, 코프는 이들보다 5년이 늦은 셈.

   코프 주교는 이때부터 1905년 조선을 떠나기까지 16년 동안 초대 주교로서 조선성공회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인천 내동교회를 시작으로 서울 정동과 낙동(구 대현각빌딩 부근)에 성공회 교회를 세우고 포교에 나섰다. 특히 경기도 평택과 충북 청주·진천으로 이어지는 교세 확장이 코프 주교가 머문 기간에 이루어졌다.

▲ 현재 내동교회 전경.
   그는 조선에서 성공회 포교의 방편으로 의료와 교육을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1890년 입국하면서 미국인 의사였던 랜디스(Eli Barr Landis) 박사와 영국 해군의 퇴역한 의무관 출신 의사인 와일스(Wiles) 등 두 명의 의사를 함께 데려왔다. 여기에는 영국 성베드로 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간호교육을 받은 수녀 2명과 수병(水兵)이 동행했다.

   코프 주교가 조선선교 활동에 필요한 자금은 SPG(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에서 지원했다. 이 단체는 외국의 성공회 포교활동을 돕기 위해 1701년에 설립됐다.

   코프 주교는 입국한 후 곧바로 인천 중구 송학동에 큰 집을 얻어 방 두 칸에 진찰실과 입원실을 꾸렸다. 첫 포교의 방편으로 병원을 택한 것이다. 낯선 이국 땅에서 성공회의 씨앗을 뿌리자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가장 좋은 방법이 병을 낫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이듬해인 1891년 4월 20일 송학동 3가 3(현재 중구 내동 3)에 250달러를 주고 외국인 조계지역 터를 구입, '성누가병원'이라는 병원다운 병원을 짓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인천에서 병원이란 간판을 처음 내건 서구식 병원의 효시는 또 이렇게 탄생했다. 이 병원은 랜디스 박사가 32살의 나이로 죽고 1901년 의사 충원마저 끊기면서 문을 닫게 됐다.

   또 코프 주교는 의료선교에만 그치지 않고 포교 개척지마다 '진명학교' 또는 '신명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신학문을 가르쳤다. 인천에도 이런 이름의 학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가 인천에 도착한 이듬해인 1891년 2월 27일 영국에 있는 로버트 수사(修士)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 상황이 잘 드러난다. "우리 선교사들은 참 좋은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의사인 랜디스박사의 방은 하루 종일 조선인들로 붐빕니다. 이 모든 것이 도착한 지 3개월 만에 이루어지고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진료 선교가 제대로 먹혀 들었다는 얘기다.

▲ 1965년 4월 내동교회 신도들이 부활절 미사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러나 코프 주교 자신은 포교활동을 하면서 의사소통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입국 후 3년이 다 된 1893년 2월 6일에 쓴 편지에 "한국말은 너무 어렵습니다. 많은 단어를 알게 됐지만 어떻게 발음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한국인들이 이미 가버리고 맙니다"라고 적었다.

   그는 또 "내가 그들 속에 살지 않는 한 결코 사랑을 배운다거나 나의 선교활동에 대해 (조선인들은)알 수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신의 모습 속에서 익숙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과 여동생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희망과 공포·자연숭배·일반적인 인간의 감정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인들은 그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켜야 합니다. 나는 무서운 표정의 영국인입니다"라며 포교활동 중 겪은 인간적인 고뇌의 단면을 보이기도 했다.

   코프 주교는 강화읍교회(1897년)를 시작으로 강화도에서도 포교를 했다. 이후 강화도에는 양사면 인화리 송산교회(1907년), 선원면 내정리교회(1905년), 삼산면 석포리 삼산교회(1906년), 길상면 온수리교회(1906년), 길상면 초지리교회(1915년), 불온면 넙성교회(1901년), 양도면 삼흥리 삼흥교회(1901년), 화도면 내리교회(1901년), 화도면 흥왕리교회(1902년), 화도면 선수리교회(1902년) 등 10여개의 성공회 교회가 급속히 번성하게 됐다.

▲ 코프주교가 사용했던 책상이 성공회대학교 역사자료관에 보관돼 있다.
   이 중 강화읍교회는 1915년 조선성공회 사상 첫 조선인 신부(김희준)를 탄생시켰고 대한성공회 내에서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성당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코프 주교가 시작한 강화에서의 성공회 번성은 본토 영국에서도 경이롭게 여길 정도란다.

   코프 주교는 1843년 5월 14일 영국의 셀리스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옥스포드대학교 내 채플에서 뛰어난 오르간 연주와 작곡 솜씨로 유명했던 음악가였다고 한다. 코프는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하고 24살 되던 해인 1867년 해군 군종사제를 시작으로 47세에 조선성공회 초대 주교로 오기까지 20여년 동안 서인도제도와 중국을 돌며 군종사제로 복무했다.

   그는 1905년 조선을 떠나 중국 베이징에서 3년여 동안 선교활동을 더 하다가 1911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건강이 악화돼 1921년 6월 30일 고향에서 영면했다.

<이창열기자·trees@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