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게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동행은 애인이어도 좋고, 친구여도 상관없으며, 가족이어도 행복하다. 내 삶의 휴식 시간을 아름다운 사람과 멋진 세상에서 소중한 시간을 만들 수 있다면 봄에 만난 청보리밭과 선운사는 이 계절 최고의 여행지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쏴아'소리를 내며 물결치는 보리밭에 초록 세상이 열렸다. 전북 고창으로 접어들면 부드럽고 풍만한 곡선을 그리며 지평선을 이루는 황토 들판이 펼쳐지고, 그 황토밭 너머로 보리밭이 보인다. 고창 청보리밭, 휘청휘청 보리 물결 건너 종달새 소리 가득하고, 넘실넘실 온통 초록 물결이다. 신록의 계절 5월로 들어서면 들판은 분주해진다.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들면 남도의 들판도 사람도 그대로 풍경이 된다.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 12만여평의 들판을 보리밭 하나로 일궈놓은 흔치 않은 농원이다. 호남평야처럼 훤하게 트인 공간은 아니지만 야트막한 언덕배기마다 보리밭이 있다. 보리는 입하(立夏ㆍ5월6일)를 전후해 가장 푸르고 6월 초부터 하지까지는 황금물결로 바뀐다. 손바닥만한 보리밭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보리의 바다가 사뭇 감동적이다. 여름 냄새를 머금은 바람에 이삭이 흔들린다. 푸른 너울이 일렁이는 것 같다. 구릉지대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청보리밭. 회색빛 도시에 익숙한 이들에겐 '보리바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터질 정도. 5월의 화사한 신록 잔치가 한 발짝 물러선 6월에 어른 허리 높이로 자란 보리들이 누웠다 일어섰다를 반복한다. 보리 물결이 출렁이면 상념에 찌든 마음이 어느새 맑아진다.

노송이 몸을 비틀고 서 있는 청보리밭 산등성이 마루. 아담한 토담집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앙증맞은 창문, 귀여운 통나무, 아기자기한 정원. 사람의 손길이 타지 않아서인가 토담집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야생화가 정겹다. 시골집 뜰에서 클로버로 꽃반지, 꽃시계를 만들던 추억이 바람결에 스친다. 쉬엄쉬엄 그 길을 걷는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고창 출신 시인 서정주의 시 '푸르른 날'의 첫 구절이 절로 읊어진다. 또 한 번 청보리가 바람결을 따라 출렁거린다. 보리밭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마음속에서 녹색 물감이 출렁거리는 것만 같다. 수평선을 보는 듯한 일망무제의 푸름. 둥실둥실 보리밭을 출렁이게 하는 시원한 바람. 눈부시게 출렁이는 청보리밭은 일상을 지배하는 '속도'를 말끔히 멈추게 하는 묘한 마력을 지녔다.

농원에는 보리밭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언덕 위의 오두막집에서 농장 본관으로 이어지는 사잇길은 산책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마로니에가 우거진 숲길이다. 보리가 익을 무렵이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향기가 더해진다. 보리밭을 감상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비포장이긴 하지만 보리밭 사이사이로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그러나 차를 타고 바라보는 보리밭은 그냥 밋밋한 보리밭일 뿐이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걷는다. 아이들은 황금물결이 넘실거리는 보리밭의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고창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선운사를 가지 않는다면 서운한 일. 선운사 대웅전 뒤편의 동백꽃 감상도 놓치지 말자. 선운사 동백은 4월 중순부터 5월 초까지 만개하는 춘동백이라 5월초가 절정이다. 또한 선운사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3.2㎞의 구간을 오르다 보면 드라마 '대장금'에서 어린 장금의 어머니 묘가 있는 동굴로 나왔던 진흥굴, 용이 뚫고 올라갔다는 용문굴, 고려시대 걸작으로 꼽히는 높이 17m의 칠송대 마애불을 볼 수 있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야생화는 보너스.

▲ 선운사
도솔암을 찾아야 선운사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중이 높은 암자다.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이란 뜻. 깎아지른 기암절벽 사이에 들어선 암자는 보기만 해도 영험이 많은 곳임을 짐작케 한다. 도솔암 옆 바위계단을 오르면 내원궁이 나온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선운산의 골짜기가 백미다.

바위산이 연출하는 거친 산세에 돌 틈에서 자라난 나무들의 푸른빛이 일품이다. 특히 가을이면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장관을 펼쳐낸다. 암자 주변에는 등불암 마애불, 용문굴, 낙조대 등 명소가 있고, 등산로는 드라마 '상도'가 촬영된 장소여서 1시간 정도의 코스로 산행을 하면 많은 볼거리를 얻을 수 있다.

고창을 찾으면 선운사와 고창읍성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치는 여행객이 많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 공원도 꼭 들러보자. 고인돌공원 고창군은 눈에 보이는 커다란 돌은 다 고인돌이라고 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고인돌이 많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죽림리, 상갑리 일대를 중심으로 약 2천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돼 있다. 청동기시대의 정신, 사회, 문화, 묘제 등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고인돌 군락 중에서도 매산리 고인돌 군락지와 도산리 북방식 고인돌은 꼭 둘러볼 만한 곳이다. 447기의 북방식·남방식 고인돌이 거대한 공원을 이루고 있다. 고인돌공원 관리사무소(063-563-2577)

여행수첩/
■ 가는 길=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선운사IC에서 빠지면 된다. 22번 국도를 따라 고창 방면으로 15㎞ 정도 간 다음 연기식당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하면 선운사. 선운사에서 아산 방면으로 8㎞ 정도 나오면 고인돌공원 이정표가 있고 아산면 소재지에서 796번 지방도로를 따라 10분쯤 달리면 무장면 소재지. 무장을 거쳐 공음 쪽으로 가다 보면 용수(계동) 버스 정류장 삼거리에 학원농장 돌 팻말이 서 있다. 왼쪽으로 군도를 타고 2㎞ 정도 들어가면 선동리 학원농장 보리밭이다.

■ 맛집=고창 하면 떠오르는 별미는 뭐니 뭐니 해도 풍천장어다. 연기식당(063-562-1537)은 여느 식당과 다름없이 양식 장어를 쓰지만, 일정 기간 동안 맑은 물만 먹여서 보관하는 독특한 방법으로 육질을 좋게 한다. 덕분에 기름기가 적어 담백하고 씹히는 맛이 쫄깃하다. 곁반찬도 진수성찬이다. 장어 1인분 1만4천원, 선운사 입구.

■ 숙박=선운산유스호스텔(063-561-3333)은 선운사 시설 지구에 위치. 고창군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어 시설이 깨끗하고 부대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특히 주변 호텔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객실이 큰 것이 특징. 유스호스텔에서는 전통 놀이, 하이킹, 유적 답사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해 투숙객에게 다양한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여행 tip/
■ 풍천장어와 복분자주
산란을 위해 바다로 나가기 전 인천강에 머물다 잡힌 풍천장어는 살집이 두텁고 기름기가 많아 숯불에 구우면 기름이 뚝뚝 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자연산을 찾아보기 힘들어져 식당에는 양식 장어가 올려지는 게 현실. 자연산과 양식은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아 쉽게 구별하기 힘들다. 가장 쉬운 구별법은 자연산은 머리가 꽃뱀처럼 뭉툭한 네모에 측면과 배에 노르스름한 빛을 띤다. 반면 양식장어는 머리가 뾰족한 세모 모양이며 배가 하얗다.

풍천장어와 함께 찰떡궁합을 이루는 게 복분자주다. 제대로 담근 복분자주는 신맛, 단맛, 떫은맛의 3가지 맛이 난다. 그 중에서도 신맛이 주가 되어야 한다. 설탕을 많이 넣어 달게 하면 술이 끈적거리고 조금만 먹어도 물린다. 복분자주를 마시면 오줌줄기가 세져서 요강을 뒤집어엎을 정도라는 말이 전해지는 강장제다. 이름 덕분인지 복분자주는 고창의 명물로 꽤나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