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지 묘역과 능원대군 묘
큰 길 따라 큰 인물들의 유택도 마련되는지 발길 닿는 곳곳이 이름난 옛사람들의 영역이다.
덕소에서 수리넘이 고개를 넘으면 나븐바위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이순지 선생 묘가 길섶에 있다. 이순지(?~1465) 선생은 세종대왕의 시대를 더욱 화려하고 다양하게 발전시킨 주인공이다. 천문, 음양, 풍수 등을 통달한 천문학자로서 정인지, 김담 등과 '칠정산 내·외편'을 저술하였다. 동래부 관노였던 장영실을 천거하여 앙부일구와 옥루 등을 제작하게 한 업적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순지 선생은 만년에 일어난 해괴한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과부가 된 딸이 사방지란 여인과 가깝게 지냈는데, 사방지는 사실 남성으로 알려진 인물이어서 간통사건으로 비화된다. 더구나 사방지를 조사한 실록을 보면,
"이것은 이의의 사람인데, 남자의 형상이 더욱 많습니다."
사방지는 남녀 양성을 가진 사람인데 남성 쪽에 더 가깝다는 말이다. 여성 쪽에 가까웠다면 레즈비언이었을 테고 남성 쪽이라면 트렌스젠더나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어쨌든 조선왕조실록은 그 기사가 다양하여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요즘엔 인터넷으로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복권기금으로 인해 공짜 아닌가.
이순지 선생 묘역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아파트 숲이 펼쳐진다. 능원대군 묘를 알리는 표지를 따라가면 화도읍 녹촌리 궁말이다. 능원대군 이보(1592~1656)는 인조 임금의 동생으로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다.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였고 청나라에서 세자를 인질로 요구하자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주청하기도 하였으며 인질로 끌려간 사람들의 가족을 잘 돌봐준 것으로 이름났다. 성품이 온후하고 건실하게 생활하여 종실의 모범이 되어서 그가 운명했을 때 임금(효종)이 친히 조상하였다. 나중이지만 종묘에 인조의 배향공신으로 추배되었다.
■ 흥선대원군 묘에서 느끼는 감정
한 시대를 호령하고 그 아들과 손자를 왕위에 앉힌 그 위세는 어디로 갔는가? 묘역은 너무도 초라하여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한다. 경복궁을 재건하고 서원을 철폐하던 서슬 푸른 기개는 어디로 갔으며, 추사의 제자로서 묵란을 치던 여유로움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총탄 자국으로 얼룩진 신도비와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의 문인석이 대원군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곡장마저 요즘의 붉은 벽돌로 조성하여 세월의 무상함이 저절로 느껴진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고양 공덕리에 조성하였으나 10년도 안되어 파주 운천면 대덕리로 옮겼고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 삶 만큼이나 묘소도 파란만장을 겪은 것일까?
옛길 따라 가평 쪽으로 발길을 돌리자마자 모란공원묘지가 나온다. 대원군은 명계에서도 시끄러운 곳에서 잠들었나 보다. 또 반대쪽 길로 30여리 가면 남양주시의 중심에 홍릉과 유릉이 나온다. 조선의 멸망 이후에 만든 능이지만 황제에 걸맞게 다른 어느 능묘보다 화려하게 장식한 능들이다. 그 아들 고종황제 부부와 손자 순종황제 부부의 능 아닌가. 흥선대원군의 묘는 그래서 더욱 초라하기만 하다.
■ 엠티의 대명사 대성리와 대동법의 잠곡에서
마석부터는 경춘선 철로와 국도가 나란히 달린다. 가평으로 들어서자마자 학생들의 엠티 장소로 유명한 대성리유원지와 만난다. 그 출발과 끝을 보낸 대성리역에는 지금이라도 추억이 뚝뚝 묻어날 것만 같다. 작은 규모의 역사에 비해 너른 마당과 기차에서 내리면 곧바로 보이는 북한강의 물결, 대성리에서의 추억을 잊기라도 할까봐 여기저기에 해놓은 낙서….
젊음의 한 길이 기찻길처럼 모이고 흩어지는 곳이다. 일대는 지금 경춘선 복선전철 공사와 고속도로 건설로 어지럽다.
그 어지러움에 비하면 잠곡은 정말 잠수라도 탄 듯이 고요하다. 청평댐을 왼쪽으로 비껴지나 안전유원지 안에 잠곡서원(潛谷書院)터가 자리잡았다. 잠곡 김육(1580~1658) 선생이 벼슬을 멀리하고 은거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선생은 온전한 시골 사람으로 돌아간다. '굴을 파고 방을 꾸며 기거하면서 화전도 일구고 때로는 이웃과 품앗이'도 하고 농한기에는 숯을 구워 팔면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백성들의 삶과 밀착된 생활을 몸소 겪은 것이다. 그것도 10여 년 동안이나.
세금 징수에 대한 모순을 해결하여 국고를 튼튼히 하면서도 서민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대동법의 시행은, 그러나 기득권층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이는 어떤 면에서 지금도 자행되는 현실이다. 직장인들이 유리지갑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그것이다.
이곳도 유원지여서 학생들과 직장인들의 엠티가 활발하다. 김육 선생이 이곳에 들어와 얻은 두 아들은 뒷날 청풍 김씨의 득세를 이끈다. 선생도 영의정에까지 오르고 공조와 예조판서 등 관직을 고루 역임한 큰 아들 김좌명은 영의정에 추증된다. 둘째 아들 김우명도 여러 관직을 수행하다가 현종 임금의 국구가 된다. 김우명의 딸이 현종의 왕비가 되어 청풍부원군이 된 것이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게 된 근본도 또한 이곳 잠곡에 서렸다.
서원의 옛터를 알리는 비석과 찬조금 내역을 적은 비석 등이 역사를 증언한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길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다.
/염상균·역사탐방연구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