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내가 조금만 양보하면 다른 사람이 즐겁잖아."

"다른 사람? 누구?"

"주변 사람들. 남편, 시누이, 친척들."

"너는? 네 자신은 어떤데?"

미서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꿀꺽 삼켰다. 목구멍에서 식도를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명치 부근이 쓰라렸다. 날카로운 바늘로 후벼파는 것 같은 통증이 가슴 전체로 느리게 퍼져나갔다. 나, 내가 어떠냐고? 그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따금 내 몸이 텅 비어서 바람이 지나가는구나. 그런 기분은 들었다. 사는 게 왜 마른 검불을 손아귀에 잡는 것 같지. 그래서 슬프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그 기분이나 느낌의 주체로 나를 세워본 적은 없었다. 슬픈 것은 늘 나를 가두고 있는 공간이나 날씨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시어머니 간호를 하면서 못 견디게 괴롭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냥 내게 주어진 시간을 보낸다. 언젠가는 끝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곳에 네가 가서 서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미서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었다.

"내가 필요한 곳에 가는 거야. 누구든 뇌졸중으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간호해야 했어. 가족이니까 모르는 척 할 수 없잖아."

"너의 마음이 어떤지를 묻는 거야. 꼬박 4년, 햇수로는 오년이야.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기분이 어땠어?"

"안심이 되었어. 돌아가셔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뭐랄까. 슬프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쁜 것도 아니었어. 그냥 덤덤했어. 사람이 죽는데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는 내가 좀 섬뜩하기는 했어. 내 신경이 갑각류의 껍질처럼 변해버린 건가 싶었으니까."

나는 가능하면 정확하게 내 마음을 설명하려고 기억을 더듬었다. 결혼 후, 일 년쯤 지났을 때 시어머니가 쓰러지셨다. 남편은 사형제 중 막내였다. 줄곧 어머니와 함께 살던 남편의 집에 내가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외국에 나가 있을 때였다. 내가 가기 싫다고 해도 가지 않을 수 없는 자리였다. 남에게 떠밀려서 갈 정도로 나는 아둔하지 않았다. 포기와 체념은 때로 사람을 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때때로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화장할 때도 있었다. 그 차이는 미묘해서 자신조차도 깜박 속을 때가 있었다. 결과는 어느 쪽이나 같았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원고 때문에 여행 못 가겠다고 말해 봤어."

"아니, 여행 다녀와서 일주일 동안 꼬박 밤 세우며 쓰면 안 될까. 그런 헛된 희망을 품고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오월 중에 다섯 권 시리즈 내놓을 계획이래. 스토리가 나와야 그림 들어간다고 말이야. 못 쓰겠으니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 이번 일이 내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아서. 사실은 울고 싶은 게 지금 심정이야."

"그런데 무슨 배짱으로 여행을 가."

나는 미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뭘 믿고 있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원칙을 정해 놓은 것은 어떻게든 이번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기적을 바라는 걸까.

"내가 도와줄 거라고 기대하는 거 아니지?"

나는 화들짝 놀랐다. 미서의 직관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염치불구하고 무릎을 꿇는 게 상수였다. 자존심이나 염치가 이미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게 우리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