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오늘 돌아오지 못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을 알기에 부모에게 도움이 되고자 북창동 어느 주점에서 일을 한다 했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모습으로 새벽에 귀가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 풍족하게 키우지 못하는 아버지로서 자책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사는 아들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다. 풍족한 아버지를 만난 다른 아들은 지금 아마 우리 아들이 시중드는 주점에서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으리라. 유학도 보내주고, 자동차도 사주고, 용돈도 넉넉하게 주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아버지의 처지가 가슴 아프기만 하다.

그런 아들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한다. 어느 대기업 회장님의 아드님과 시비가 붙어 다툼이 있었고 그 회장님의 아드님은 눈이 찢어졌단다. 남의 귀한 자식의 눈 주위에 상처를 냈으니 아버지는 내가 잘 못 가르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아들 앞에 그 회장님과 아들 그리고 건장한 사내들이 나타나 캄캄한 밤,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곳으로 이끌리고, 다그침과 폭행을 당했다 한다. 그래도 우리 아들은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누가 우리 아들을 때렸냐고 추궁하는 그 아드님의 그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한 달 동안 우리 아들은 왜 이 아버지에게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두려웠다고 아팠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 아버지는 동반할 건장한 사내들도, 변호사도, 고위층 출신의 고문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그저 '우리 귀한 아들 누가 이렇게 했냐?' 고 악다구니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

세간에 '그 아버지와 그 아들'에 관한 사건이 화제다. 그러나 앙갚음을 당한 자들의 아버지들의 심정은 이렇지 않았을까? '그 회장님이 너무 아들을 사랑했기에 그랬다' '이 사건으로 반재벌 정서를 부추긴다'라는 말이 나온다. 참으로 본질을 흐리는 말이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으랴?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도 되나? 세상 아버지들의 가슴 속 깊은 뜨거운 사랑을 '싸구려'로 만들어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부성애(富成愛)'는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다.

/문화커뮤니케이터·남서울대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