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강뱃길. 양구로는 북한강변을 따라 서울에서 양구로 향한 길이다. 화천댐과 청평댐이 건설되고도 여객선과 화물선이 부분 운항되던 북한강 뱃길은 1974년 팔당댐 건설로 막을 내렸다(사진은 가평읍 보납산에서 본 북한강과 춘성대교의 경강국도). 사진/조형기전문위원·hyungphoto@naver.com
   서울에서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강원도 양구가 나온다. 양구로는 북한강변을 따라 난 길이다. 조선시기에 여행객들은 강변을 따라, 혹은 산길을 질러 걸어갔지만 간혹 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짐을 실은 배는 북한강 하구에서 250㎞ 남짓 소류, 즉 거슬러 올라가 양구에 이르렀다.

▲ 경춘선철도 복선화공사와 남양주 평내동의 대단위 아파트건설로 폐쇄된 마치터널.
   북한강 수운(水運)은 을축년, 즉 1925년의 대홍수를 계기로 시작된 화천댐과 청평댐의 건설로 쇠퇴하다가, 1974년에 준공된 팔당댐 건설로 막을 내렸다. 팔당댐이 강을 막기 전까지 여객선과 화물선이 부분 운항되었고, 북한강 상류와 홍천강으로 내려오다가 청평댐에 막혀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한 강원도산 원목과 장작은 종착지인 오대골까지 연장한 경춘선 철로를 통해 서울로 운송되었다.

   청평댐 아래, 예컨대 가평 외서면 삼회리같이 배후에 산을 두고 있는 마을에서는 철도의 도움 없이도 뗏목과 장작배를 서울까지 내려보낼 수 있는 곳이어서 팔당댐이 생기기 전까지 매년 산판이 벌어졌다. 마을 주민 중 5~6가구는 장작을 패서 배에 싣고 서울 뚝섬까지 가서 팔고 돌아오는 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장작은 지름이 약 4~5㎝되게 쪼개어 약 80㎝ 길이로 10개를 묶으면 1단이 된다. 배 한 척에 많으면 3천단까지 실었고, 쌍배 또는 쌍둥이라고 하여 배 두 척을 묶어 6천단을 싣기도 하였다.

   대개 뚝섬까지는 하루 일정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2~3일이 소요되었다. 특히 북동풍 높새바람이 불면 내려올 때는 빠르지만 거슬러 올라오기가 힘들다. 도중에 여울을 만나면 한 명은 밧줄을 몸에 매어 당기고, 한 명은 삿대를 어깨에 대어 배를 밀어올려야 한다. 장작배는 주민들의 중요한 물자공급 수단이었다. 장작을 싣고 내려간 배가 돌아올 때는 소금이나 젓갈을 싣고 왔으며, 농사에 필요한 비료도 배로 운반하였다.

▲ 무드리나루.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에 있는 나루로 강건너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와 연결된다.
   그러나 육로교통의 발달로 북한강을 운항하는 배는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오대골을 출발하여 강원도 홍천군 마곡리 말골까지, 그리고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 안반지를 출발하여 홍천군 서면 마곡리 말골까지 왕복하는 여객선만 남게 되었는데, 그것도 이제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관광수단이 되었다.

   평구역에서 춘천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뱃길을 따라가보자.

   10리를 4.5㎞로 계산할 때 평구역에서 2리, 즉 약 900를 가면 덕수나루가 나온다. 덕수에서 바당, 즉 팔당나루까지 10리로 여기까지가 양주 땅이다. 팔당나루 다음에 만나는 봉안역(奉安驛), 마현(馬峴), 고랑(古浪), 용진(龍津)은 광주 땅이다. 이후 무네미, 즉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까지 과거 양근 땅을 밟다가 무네미 나루에서 양주로 건너와 굴운역(屈雲驛)에 이르는데, 약 36리가 된다. 여기서 청평까지는 20리다. 굴운역은 현재 대성리 유원지입구 부근인데, 이번 답사에서 역 자리는 찾지 못했다. 남양주시 수동면의 수동천을 이어 강 좌안으로 합류하는 구운천은 과거에는 '구른내'로 불렀을 것이다.

   육로는 청평에서 북으로 방향을 잡지만 배를 타면 동쪽을 향하는데 범우리까지 10리, 범우리에서 자잠이까지 10리 거리다. 현재는 363번 지방도와 37번 국도가 강 양쪽으로 나 있다. 범우리의 현재 지명은 누군가 범이 운다는 뜻을 한자로 새겼는지 가평군 외서면 호명리(號鳴里)다. 자잠이는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자잠마을이다. 그 사이에 황공탄(惶恐嘆)이 있었는데, 극히 두려운 여울이라는 뜻으로 '저흔 여흘'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청평호반 아래 깊숙이 묻혀 그 이름을 잃었다.
▲ 청평댐. 가평군 외서면 청평리에 있으며 1943년에 준공됐다.

   자잠이에서 춘천에 이르는 길은 다시 북쪽을 향하며 경기도와 강원도를 넘나든다. 소리(所里), 갓내올(笠川洞), 복정포(福靖洞·현 복장리), 쇠터(牛墟·현 금대리 금대나루)는 가평 땅이고, 방해올(芳荷洞), 이영골(利永洞)은 현 춘천시 남면 마을이다. 이영골에서 강 건너 안반지와 자라목을 지나면 가평 읍치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안보역(安保驛)이 있던 춘천시 서면 안보리가 나온다. 춘천 읍내를 가려면 여기서 옷바위(衣巖), 오름실, 삼뉘, 새소(新淵)방골을 거쳐 오뫼나루에서 배를 내린다.

   여객선의 가평 종점인 가평읍 달전리는 2개의 행정리로 나뉘어 달전1리를 청룡안, 2리를 새말이라고 부르고 달전리 전체를 통틀어 부를 때는 안반지라고 한다. 새말은 똑딱선이라고 부르던 여객선 선착장이 있던 곳이다. 여객선 운항이 끊긴 지금은 남이섬을 건너는 선착장 역할만 한다. 도강을 위한 배는 나룻배도 있지만 장날에 맞추어 소를 실어 나르는 장방형의 '소배'도 있었고, 강 건너 남이섬의 논밭을 짓기 위해 건너는 '농배'도 있었다. 소를 건네는 데 내는 삯은 사람의 두 배다. 가평 우시장은 원래 가평시장 옆에 있었는데 장소사용료가 비싸 임대료가 싼 이곳 달전리로 옮겼다. 그러나 이곳도 버스길이 생기면서 폐쇄되어 춘천이나 홍천에서 오는 소가 이곳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장으로 가게 되었다. 

▲ 창현리길. 무드리나루를 건넌 소장수와 행인들은 이곳 창현리를 지나 마석우리장으로 향한다.
   무드리 나루는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에 위치한 나루로 강 건너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와 서울, 청평 등지를 다니기 위해 건너던 나루다. 개천 하구에 산이 솟아있어 급물살을 막아주기 때문에 짐배나 뗏목이 이를 피해 여러 날 묵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주변은 주막 아니면 색시집이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이 일대 주민들이 마석장을 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나루의 역할도 컸다. 나루를 건넌 다음 화도읍 금남리 금대 마을 남쪽의 금남저수지 옆 고갯길을 넘으면 46번 경춘국도에 이르게 되어 이곳에서 버스 또는 도보로 마석장으로 이동하였다.

   마석장은 이와 같이 양구로를 따라 내려오는 소와 강원도 홍천에서 가평 설악을 넘어오는 소를 집결하여 규모가 큰 우시장을 이루었다. 경춘선 마석역이 생긴 이후로는 이 일대의 소가 이곳에 모인 다음 기차로 서울까지 운반되었기 때문에 우시장은 더욱 커졌다.

   소군이 나루는 수입리 바치울 마을과 꽃대울 마을 사이에 있는데 강 건너 남양주시 금남리에서 관리하던 나루다. 가평 설악면에서 덕소를 거쳐 서울로 가는 최단 경로는 이 나루가 만들어 준다. 내수입에서 바치울로 고개를 넘으면 그 아래에 마방이 있어 설악에서 서울로 가는 소장수들이 하루를 묵은 후 현 88번 지방도를 타고 동서를 가로질러 덕소장까지 갔다. 일부 채꾼, 즉 소몰이꾼들은 마석장으로 빠지거나 아예 서울까지 가서 휘경동 떡전거리에 있던 마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2009년 8월 개통 예정인 서울~춘천 고속국도가 과거 지름길이었던 이 88번 지방도와 나란히 닦이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강과 지형을 따라 형성되었던 옛 길은 철도의 시대를 거쳐 이제는 지도에 금을 긋듯 직선을 지향하는 고속도로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승모 지역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