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동구청이 운영하는 달동네박물관(문의:032-770-6135)에는 지금 '한 개인의 일상기록'을 공개하는 특별한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이 박물관의 본래 명칭은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으로 1960~1970년대 달동네 서민의 생활상을 테마로 지난 2005년 10월 개관했다.
인천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은 '수도국산'하면 '달동네'를 떠올릴 만큼 인천 토박이들에게는 정겨운 고향같은 곳이다. 달동네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동네'라는 뜻으로 서울 봉천동을 비롯 아직도 전국의 대도시 주변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도시산업화의 부산물이다. 수도국산 달동네는 달동네 중에서도 그 유래와 역사가 깊다.
달동네박물관은 개관 이후 '이광환(사진·1926~2000년) 일기' 특별전을 첫 기획전으로 지난달 4일부터 선보이고 있다. 이 기획전은 고 이광환씨의 장남 이조영(55·동구 송현동)씨가 선친의 일기를 박물관에 기탁하면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 일기를 기록한 이씨는 1926년 송현동 38에서 태어났고 지난 2000년 같은 동 56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에 다녔던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그가 경성전기에서 맡았던 일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전기공 또는 검침원 일에 해당된다.
오는 10월말까지 이 박물관에서 전시될 그의 일기는 모두 26권으로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70년까지 26년의 기록을 담고 있다.
그는 깨알같은 글씨로 일기장 군데군데에 한자를 섞어 가며 1년에 일기장 1권을 쓸 만큼 일기광(狂)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우산과 양은 냄비를 사기 위한 계'를 들고, '회충구제(蛔蟲驅除)를 위해 산도멜을 많이 먹어 어지럼증'이 생기기도 하고, '산아제한을 위한 피임약'을 보건소에서 타와야 하는 당시의 사회상이 진솔하게 기록됐다. 또 일기가 시작되는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격동의 현대사를 평범한 소시민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달동네박물관의 '이광환 일기' 특별전을 상·중·하 3회로 나눠 연재한다.
이씨에 따르면 '한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전단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군은 일본군의 항복조건을 여행(勵行)하며 한국의 재건과 질서있는 정치를 실시하고자 근일 중 귀국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불행한 국민에게 자비심 깊은 민주국가인 미국에서 실시하는 것이니 확실한 것입니다. 이 거사의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또 늦어지고 빨라지는 것은 오로지 한국민 자체 여하에 있는 것입니다. 주민의 경솔하고 무분별한 행동은 의미 없이 인명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도 황폐되어 재건이 지체될 것입니다. 현재의 환경은 여러분의 생각하고는 맞지 않더라도 장래의 한국을 위해서는 평정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국내에서 동란을 발생할 행동이 있어서는 절대 안되겠습니다. 이상 지시함을 충실히 지키면 귀국은 급속히 재건되고 동시에 민주주의 하에서 행복하게 생활할 시기가 속히 도달될 것입니다."
지난 2003년 3월 새벽 작전명 '이라크의 자유(Freedom of Iraq)'를 위해 이라크를 전격적으로 공격했던 미국의 선전문구가 이러했을 지 모를 일이다.
다음 날인 9월2일 오전 9시15분 요코하마 앞바다 미함 미조리호에서는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 원수와 영국·소련·중국 등 승전국이 일본을 상대로 정전 협정 조인식을 가졌다.
8일 미군은 인천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오후 2시경에 나는 인천재판소 옥상에서 상륙광경을 보는데 그 때 상륙한 미군 10명이 일본군의 안내로 재판소 내로 들어와 여러가지 서류 등을 본 후 옥상에 미 국기를 달았다. 미군은 항상 웃는 얼굴이고 가끔 우리들에게 영어로 문답을 한다. 도로에는 조선청년들이 연합군 국기를 들고 약 천명 가량이 행진을 보였다. 기에는 조선독립만세니 기타문구를 써서 가진 사람도 있다. 이 행렬이 재판소 앞을 지나갈 때 인천경찰서에서 경관이 나와 권총으로 쏘아 부상자가 나고 환영은 중지되어 풍비박산이 됐다."
상해임시정부 수석 김구 선생은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고 한달 뒤인 1945년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일행 13명과 함께 김포 비행장으로 들어왔다.
이씨는 이듬 해 하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을 보기 위해 미군청 앞 광화문통을 찾았다. 좌익계의 건국청년단과 우익계의 한국청년단이 따로 대오를 맞춰 시가행진을 하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도 하지 중장에 이어 각기 인사말을 했다. '조선고려교향악단'은 미국 국가는 물론 영국·소련·중국 국가도 함께 연주했다.
1946년9월28일에는 경성전기가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씨와 동료 10여명은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우리 파업의 목적은 쌀과 돈의 요구인데 어째서 정치적 색채를 띄우냐는 것'이라며 불만이었다. 이들은 파업 탈회 선언서에 도장을 찍고 집회했지만 곧 해산하고 말았다. 좌익과 우익의 '백주 테러'로 피를 흘렸던 당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4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 박사는 종신대통령을 꿈꾸며 1960년 3·15 부정선거로 하야했다가 1965년 이국땅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이씨는 7월 27일 "이승만 박사의 장례식이 백만인파 장송과 만장의 물결, 곡성 따라 국립묘지 공작봉에 안장됐다. 감기로 상경 못하고 집에서 동네 부인들과 TV로 장례식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이씨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1969년 영구집권을 노린 유신헌법 개헌 투표에서는 "국민투표에 참가하기 위해 사람들도 얼마 없는 동회투표장에 나가서 투표를 하였다. 그런데 투표장에는 공화당 참관인만 있고 신민당 참관인은 없어 이상했다. 이번 선거부터 새로 주민등록증 제시가 전과 달랐다"고 적고 있다.
1969년 11월3일에는 '달을 밟고 온 세계의 빈객'인 아폴로 11호의 비행사 닐 A 암스트롱과 에드윈 E 엘드린, 마이클 코린즈 등 3명이 조선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속에 입경(入京)한 것을 이웃사람들과 TV를 통해 보았다.
영화보기가 밥보다 좋고 댄스 교습소에서 트로트부터 탱고·룸바·블루스·지루박을 배웠던 이씨였지만 격동의 현대사는 빗겨갈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