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최초 해외여행가 김찬삼< font>최초>
세계를 32바퀴나 돈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여행가 김찬삼 교수. 그는 30여 년 동안 160개 국가, 1천여 개 도시를 돌아다녔다. "늘 도전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서 인생을 배워라." 김 교수의 인생관이자 여행관이다.
김 교수의 숨결을 직접 느끼기 위해 지난 4일 오전 인천시 중구 중산동 구읍뱃터 인근 '세계여행문화원'을 찾았다.
문화원은 여행도서관, 여행카페, 기념관 등 5개 건물로 이뤄져 있다. 문화원에는 김 교수가 30여 년간 여행하면서 수집한 사진과 귀중한 자료들이 보관돼 있다. 김 교수가 우리나라 해외여행의 시초이니, 김 교수의 삶과 여행사(史)가 담긴 문화원은 우리 여행사의 보고(寶庫)인 셈.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던 1960~70년대, 김 교수의 여행기는 독자들을 알래스카로, 아프리카로 이끌곤 했다.
"탐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사준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10권)을 읽은 뒤부터다. 책이 다 닳도록 수 백번을 읽고 또 읽었다. 그 책을 보면서 탐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산악인 박영석씨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바로 김 교수라고 분명히 말한다.
김 교수는 '인천 사람'이다. 비록 인천에서 태어나진 않았으나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인천에서 살았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남다른 노력도 기울였다.
그럼에도 인천에서 김 교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교편을 잡거나 학교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나 스스로 '세계의 나그네'라고 불리길 원했던 것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한 곳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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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삼교수의 배낭 |
김 교수는 인천 창영초등학교 출신이다. 1939년 3월 29회 졸업생이다. 하지만 김 교수의 학적기록부는 찾을 수 없었다. 해방 전이라 학교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초교 졸업 후 제물포고등학교의 전신인 6년제 인천중학교에 다녔다. 그런 뒤 서울사범대 지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김 교수는 3~4년간 인천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김 교수가 여행 인생을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1957년 갑작스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런 뒤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그 곳의 주립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다고 한다. 1년 남짓 모은 돈은 300달러. 그러나 이 돈을 학비에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숙박시설이 돼 있는 고물차 한 대를 구입했다. 그리고 무작정 알래스카로 떠났다. 이 것이 김 교수의 첫 해외여행이었다고 한다.
"가슴을 펴고 세계를 바라보라. 그리고 거침없이 나아가라." 1961년 김 교수는 자신의 1차 세계여행을 마친 뒤 고향 땅 인천 강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재직했던 인천고에서 였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소설가 이원규씨에게도 김 교수의 여행담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고 한다. "마치 고행 수도자처럼 위험과 역경을 헤치고 세계를 돌아보고 와서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은 넓은 세상으로 통하게 하는 한줄기 빛이었어요."
김 교수는 1961~1978년 경희대 문리대 강사와 세종대 전신인 수도여자사대 조교수·부교수 등을 역임하면서도 꾸준히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이 사이 그는 6차례나 세계여행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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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삼 교수는 1963년 아프리카 가봉 한 병원에서 슈바이처 박사를 만났다. 그리고 보름 동안 슈바이처 박사를 도와 환자들을 돌봤다고 한다. |
그는 비문명지를 다닌 탓에 늘 자랑삼아 말했던 슈바이처 박사와의 아름다운 추억도 만들 수 있었다. 1963년 통나무배를 타고 아프리카 가봉의 한 병원을 찾아갔던 김 교수는 이 곳에서 슈바이처 박사를 만난 것이었다. 그는 보름간 이 병원에 머물면서 슈바이처 박사를 도왔다고 한다. 당시 병원을 떠나는 김 교수에게 슈바이처 박사는 "성공하려면 한 우물을 파라. 그 것도 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 파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또한 후학 양성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부친은 1961년부터 1973년 3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동산중·고교의 재단인 동산육영회 5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 교수도 뒤를 이어 1978~1982년 사이 제8대 이사장을 지냈다.
김 교수는 당시엔 보기 힘들었던 1인1좌석 책상(책상과 의자가 붙은 것)을 마련, 학교에 기증했다. 3억원을 기증하겠다는 약속도 지켰다.
동산중·고교 관계자는 "'인세를 모아 마련했다'고 하시면서 3억원을 학교에 기증했어요. 그런데, 돈을 기증한 것은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다음이었어요. 이사장직 재직시 돈이 없어 지키지 못한 약속을 한참이 지난 다음에 지킨 것이었어요"라고 했다.
김 교수의 인천 사랑은 유난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인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기를 바랐다고 한다.
수도여자사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인천 출신 수험생이 입학을 위해 면접에 참여하면 영락없이 인천 향토사를 잘 아는 지 꼬치꼬치 캐물을 정도였단다. 잘 알지 못하면 "인천 사람이 인천을 몰라서야 되겠느냐. 인천을 제대로 알고 그런 뒤 지리학을 공부하라"고 따끔히 충고했다는 것.
1992년 김 교수는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67세 때였다. 칠순을 바라보는 그는 실크로드와 서남아시아, 유럽을 잇는 7만3천㎞ 여행길에 올랐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만 인도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김 교수가 열차 사고를 당해 머리를 다친 것이었다. 곧바로 귀국했으나 그는 언어 장애현상을 앓았다.
하지만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의 여행에 대한 열정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96년엔 가족 몰래 동남아를 여행하기도 했고, 98년엔 '실크로드를 건너 히말라야를 넘다'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2001년 김 교수는 자신 삶의 기록과 여행기를 모아 영종도 별장 자리에 '세계여행문화원'을 세웠다. 여행문화원 개원 후로도 계속 언어 장애현상을 보이던 김 교수는 2003년 서울 자택에서 숨졌다. 향년 78세. 세계의 나그네로 불리길 원했던 그도 외로웠던 것일까. 그가 숨진 것은 그의 아내 정안순씨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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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삼 교수가 평생 모은 여행과 관련한 세계의 기록들이 문화원에 보관돼 있다. |
이 문화원이 올 연말이면 헐릴 위기에 처했다. 올 초 문화원 부지는 토공 인천지역본부에 수용됐고, 12월 하늘신도시 건설을 위해 헐릴 예정이다. 이곳엔 영종진을 복원한 영종역사관이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여행 관련 문화원이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운동도 준비되고 있다. "'고(故) 김찬삼 교수 기념관 헐릴 위기'란 신문 보도(경인일보 4월 27일자 19면 보도) 이후 문화원에는 하루 걸러 한 명씩 반가운 얼굴이 찾아 와요." 직원 정성임씨가 말했다. 반가운 얼굴은 김 교수가 문화원에 머물던 당시부터 시 낭독회 등을 가졌던 문인들이다.
김 교수의 아들 장섭씨는 "많은 사람들이 헐지 말아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힘을 모아 폐관을 막겠다고 한다"며 "단지 개인이 아닌 우리 해외 여행사(史)가 고스란히 보관된 곳이라 문화적 가치도 상당하다. 문화원이 폐관되지 않도록 많은 시민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장훈기자·cooldude@kyeongin.com>김장훈기자·cooldud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