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3년 9월쯤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인천에 처음왔을 때다. 선배들이 '촌놈' 환영식을 해주겠다며 저녁 자리를 만들었다. 구월동 시청 주변에 위치한 한정식 집으로 기억된다. 술이 몇순배 돌자,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왔다. 그때, 바로 옆에 있던 선배가 빙그레 웃으며 인천에 오면 꼭 가봐야 할 명소(?) 두 곳을 추천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린 택시에 올랐다.

"끽동으로 가주세요. 직접 봐야 알지…."

잠시후 도착한 곳은 남구 학익동에 위치한 인천의 대표적인 집창촌(특정지역)인 ' 끽동'. 끽동은 학익동에 위치한 집창촌을 지칭하는 속어다.

택시안에서 선배가 인천의 '끽동'과 남구 숭의동 '옐로 하우스'에 대해 설명을 한 터라 어떤 곳인지는 대충 감은 잡았다. 택시에서 내려 대형 아파트 단지를 끼고 골목길로 들어서자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골목을 환히 밝혔다. 업소마다 '집창촌 종사 여성'들이 나와서 "여기서 놀다가"라고 외치며 호객행위를 시작했다. 그들은 20대 초중반의 여성들로 인물이 뛰어났다. 몇몇 여성들은 세일러복까지 착용하고 손님들을 유혹했다.

한복이나 드레스를 입고 유리창 안에 곱게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그녀들은 뭇 사내들의 손에 이끌려 하나 둘씩 사라져 갔고, 업소에선 남자들이 쉴새없이 드나들었다. '불야성(不夜城)'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선배들은 골목길을 가로 지르며 "기자를 하려면 '끽동'은 알고 있어야 한다"며 필자에게 난생 처음 집창촌을 구경시켜줬다. 말로만 듣던 집창촌을 둘러본 뒤 필자는 아주 오랫동안 유리안에 있던 그들의 모습이 머리속에 머물렀다.

인천에 매춘을 전업으로 하는 '공식적인' 창기(娼妓)가 등장한 것은 1876년 개항이후로 각종 문헌에 기록돼 있다. 조선조까지는 철저한 밀매음 형태였다. 그러나 개항과 더불어 일본은 인천, 부산, 원산 등 개항지를 중심으로 집창촌(集娼村)인 유곽을 설치했다. 1916년에는 '유곽업 창기 취체규칙'을 만들어 매춘을 공식화 하고 창기들에게 세금을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창(公娼)제도가 도입된 것이다.그러다 공창제도는 1947년 미 군정청에 의해 폐지됐지만, 미군 주둔지 등을 중심으로 '독버섯' 처럼 번져 나갔다.

끽동은 이때부터 음성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끽동은 과거 인천의 슬픈 역사의 거울이기도 하다.

끽동에서 30여년간 터를 잡고 살아 온 이은동(55)씨는 "6·25전쟁 당시 이 지역은 하천 둑방으로 주변에 논이 있던 곳이었다"며 "현재 동일레나운 맞은편에 전쟁 당시 외국 군인들이 상주하는 2개의 군부대가 생기면서 집창촌이 형성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런 슬픈 역사를 간직한 남구 학익동 414일대 5천여평 끽동은 지난 4일 마지막 남은 집창촌 집 한채를 건설사가 철거함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곳에는 53층짜리 초고층 아파트 엑슬루타워(700여세대)가 들어서게 된다.

■ 옛 업주가 밝히는 '끽동 실태'
"10년 전까지만 해도 호황을 누렸던 '끽동'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네요."

학익동 정화위원장 고영곤(55)씨. 고씨는 6여년전까지 인천 남구 학익동 특정지역에 들어와 업소를 운영해오다 지난해 말 자진폐쇄했다.

그는 "이곳 대부분이 시유지였고 무허가 건물에서 영업을 하던 곳이 많은데다 성매매특별법으로 단속이 심해지면서 영업을 포기하고 나왔다"고 말했다.

2004년 이전까지만 해도 60여개 업소에 180여명 성매매여성 종사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성매매에 대한 단속이 심해지면서 지난 2005년께 28개 업소가 1차 폐쇄에 들어가면서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고씨는 전했다.

고씨는 "6년 전에 지인을 통해 이곳에 들어와 영업을 했지만, 이미 불황이 시작된 뒤였던 터라 오히려 빚만 떠안고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5명의 성매매 종사 여성들과 당시 선불금으로 개인당 3천만원 정도를 주고 영업을 했는데 그냥 여성들이 나가버리는 바람에 2억원 정도의 빚을 안게 된 것.

그는 "이곳을 폐쇄하고 나온 업주들 대부분 보도방이나 안마, 휴게텔 등을 운영하거나 평택, 수원의 집결지로 자리를 옮기는 등 다시 성매매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특히 학익동이 폐쇄되다보니 인근의 숭의동 옐로 하우스로 옮겨가 그곳이 활성화 되는 추세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고씨는 "집결지 한 구역을 폐쇄시킨다고 해서 성매매가 없어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며 "다양한 방식으로 전환돼 이제는 전화 한 통이면 어느 곳에서나 성매매가 이뤄질 수 있게 돼 결국 전국이 성매매의 장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사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