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미서씨는 결혼 전에 이미 프로였고, 당신은 그게 아니잖아."
"등단절차를 밟는 것도 중요해.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내 글을 원해. 돈을 주고 산다고. 그것으로 된 거 아냐."
남편은 비웃는 표정으로 나를 힐끔 돌아보았다. 물론 비웃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비치는 것을 어떡하겠는가. 불과 몇 분전에 느꼈던 평온과 관조, 스스로 자랑스럽던 감정이 얼마나 허약하고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달았다. 이렇게밖에 대응할 수 없는 내가 우스웠다. 마치 내가 원하는 게 돈, 형식, 등단절차와 프로, 이런 것들인 양 되어버렸다. 내가 바라는 것은 두 부분이 겹쳐지는 교집합 속에 있는데 겹쳐지지 않는 다른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미 궤도를 벗어나 버린 감정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는 글렀다. 좀 더 함께 앉아 있으면 승산도 없는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남편도 거칠게 리모컨을 누르며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바꾸었다.
남편은 내게 아내 이상의 자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아내로서 만족할 수 있으면 남편이나 나나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내 존재가 온통, 지속적으로 아내로 남아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양파처럼 수많은 층들로 되어있었다. 한 꺼풀이 벗겨지면 또 다음 층이 나오듯 나는 아내도 되었다가 글 쓰는 사람도 되었다가 욕망을 가진 짐승 같은 여자도 되었다가, 순정을 지닌 소녀로도 변신했다. 양파를 다 벗기면 아무것도 남지 않듯 어떤 한 역할에 고정될 수 없는 게 인간이었다. 남편은 나를 쇳덩어리로 뭉쳐진 구슬처럼 여겼다. 변신이 불가능한 광물성. 남편의 생각이 다른 것에도 그렇게 일관성 있게 적용된다면 아마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남편은 필요한 사람에게는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적용했다. 정말 화나는 것은 남편의 그 이중성이었다. 자신의 편리에 따라 자를 갖다 대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커피 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잔이 깨져버렸다. 깨진 잔처럼 마음이 산산이 흩어졌다. 두루마리 휴지를 손바닥에 둘둘 감고 물을 약간 묻힌 후, 깨진 조각을 닦아냈다. 커피가 스며든 휴지는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방사선 형태로 분노가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노의 표적이 남편만은 아니었다. 나를 향해 방향을 바꾼 분노도 있었다. 지난 세월을 아무런 생각 없이 보낸 대가야. 누구도 너에게 그렇게 살라하고 강요한 적은 없어. 누군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희생을 했든 봉사를 했든 시어머니를 간병한 것도 내 생활의 일부였다. 그것마저 부정한다면 내게 무엇이 남을 것인가. 따스한 가족애나 진심이 담긴 간병이 아니었어도 지금 그 시간을 후회한다는 것은 어리석었다. 막연히 병원을 오가며 보낸 오년, 피해의식을 갖지 말자. 나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나 때문에 한 사람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다소 편하게 지낼 수 있지 않았는가. 그것으로 된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두루마리 휴지를 풀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금파리에 발을 베이지 않으려면 꼼꼼하게 바닥을 닦아야 했다. 아끼던 커피 잔이라 아까웠다. 도로 붙일 수 없는 물건. 마음도 그와 같을까봐 두려웠다.
쓰레기통에 깨진 사기 조각과 젖은 휴지 뭉치를 밀어 넣었다. 남편은 다른 사람의 실수에 별로 너그럽지 않았다. 말을 않고 묵묵히 앉아있지만 아마도 속으로는 불쾌할 것이다. 병 끝이라 기운도 없고 안색도 창백한 나를 봐주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에 봐 준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내가 바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