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래학자들은 '저출산과 고령화가 핵무기 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라고 연일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만 불과 30년 전에는 다(多)출산 문제가 우리나라는 물론 전지구적 난제였다.
영화를 못 보신 독자들을 위해 잠깐 대강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이렇다. 1970년대 초 잘 먹고 잘 사는 게 꿈이었던 시절, 국가사업에 역행하는 '용두리'라는 이름의 시골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가족계획 전국 꼴찌를 독차지하는 한편 전국에서 최고의 출산율을 자랑하는 부부간 금실 좋기로 소문난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가족계획 광고를 만들어 계몽하려 해도 텔레비전이 없고, 홍보 우편물은 닿지 않을 만큼 외진 마을이었다.
국가는 급기야 이 마을에 '가족계획 요원(김정은 분)'이라는 공권력을 투입한다. '가족계획 요원'은 TV가 없어도 잘 살고 피임을 몰라도 행복했던 이 마을 부부들에게 콘돔 사용법을 설명하는 등 부부들의 잠자리를 관리하기 시작한다.
이후에는 불임시술을 받은 무주택자에게 아파트 입주 우선권을 준다든가, 예비군 동원훈련을 가서 정관수술을 받으면 훈련을 면제해준다든가 하는 당근정책도 제시된다. 지금 돌이켜 상상해보면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얼마전 일명 '로또'로 불렸던 판교 아파트 분양권은 옛날과는 정반대로 3자녀 이상일 때 가점을 받았다.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이광환(1926~2000) 일기'를 보면 영화 '잘 살아보세'가 결코 허구의 풍자코미디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씨는 1965년 4월15일 일기에서 "보건소원이 동회에 나와서 피임약을 주어 안형(安兄)편에 4월분으로 이번에는 일제 고무 콘돔 6개를 받아왔다. 이것으로 두 번째다. 등록번호는 61번이다"고 기록했다.
이듬해인 1966년 4월16일 일기에서는 "최초로 경구용 피임제 'ANOVLAR21' 복용을 시작했다. 국제가족계획연맹이 승인하고 대한가족계획협회 추천품으로 독일 쉐링제약회사에서 제조하고 일성신약에서 수입한 약으로 값은 1개월치가 1갑에 250원이다. 이 약은 안형이 신신약방에서 외상으로 사왔다"고 적고 있다.
당시 결혼한 남성은 국가시책에 따라 보건소에 등록, 매월 정기적인 관리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는 국가재정 문제로 개인부담으로 전가됐지만 의무가 면제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일선 학교에서 기생충 검사를 위해 채변봉투를 나눠주는 것이 금지됐지만 30대 후반의 연령층까지도 '채변봉투'는 학창시절 추억 중 하나일 듯 싶다.
이씨의 일기에서는 기생충구제(寄生蟲驅除)와 관련해 1957년 4월21일 일기에서 "춘계회충구제(春季蛔蟲驅除)를 했는데 약은 유한양행 제품 '산도멜'을 복용법에 따라 어제 밤 식사를 반량(半量)하고 난 뒤 4시간 후 취침시 6정을 먹고 기상한 즉시 5정을 먹은 뒤 3시간이 경과되어 조반식사를 하였는데, 약을 과량으로 먹었는지 허약하여 그러한지 황시증(黃視症)을 이루고 황뇨증(黃尿症)이 생기었다. 조반 식사 후 설사를 하니 대형 회충 4마리가 나왔다"고 적고 있다.
요즈음이야 회충약을 복용하고 '하늘이 노래지는 어지러움증'이 생기면 약화사고로 당장 병원으로 달려갈 일이지만 회충이 살아서 항문으로 나오는 것이야말로 지금 돌이켜 보면 엽기가 아닐 수 없다.
이씨의 일기에서는 "어머님은 네오톤, 전 가족은 원기소 복용으로 건강에 힘쓰기로 했다"(1957년 7월3일)고 적고 있어 요즈음으로 말하면 알로에와 글루코사민 등과 같은 건강보조식품에 대한 이야기도 찾을 수 있다.
원기소는 1950년대 후반부터 판매되기 시작해 어린이 영양제의 대명사로 통했다. 원기소는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40~50대는 물론 30대 후반에게까지도 대표적인 어린이 영양제로 기억되고 있다.
그 맛은 땅콩을 바짝 볶은 고소한 맛으로 먹다보면 치아에 가루가 끼기도 했다. 몇 알을 먹어도 그 고소한 맛은 질리지 않았다.
현재 어린이 영양제는 포도맛, 딸기맛 등으로 맛을 낸다지만 원기소야말로 아마도 '약'을 맛으로 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약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원기소는 영양성분이 함유된 영양제가 아니라 소화제를 생약화한 소화촉진제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권용오(권내과의원장) 인천시의사협회장은 "원기소는 요즈음 판매되는 비타민과 철분 등 영양성분이 함유된 영양제라기 보다는 소화효소를 생약제제로 만든 소화촉진제에 가깝다"며 "의약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의 유일한 어린이 영양제였던 원기소는 부모님의 자식사랑과 어린이들에게는 만족감을 주는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에 가깝다"고 말했다.
부모님의 지극한 자식 사랑은 영양성분이 없는 영양제인 원기소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식 교육은 이 땅의 부모님들이 그네들 부모에게서 원형으로 물려받은 정신유산 가운데 으뜸일 것이다. 이씨가 살았던 수도국산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동리'인 달동네였지만 자식교육에서 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이씨는 1964년 5월14일 일기에서 "대학교에 재학중인 학생 한 사람을 정인섭 부인이 소개하여 주어 저녁에 조영(장남)이를 데리고 그의 집으로 대학생을 찾아가서 내일부터 과외공부를 지도하여 줄 것을 부탁하고 왔다. 수업료는 한 달에 500원으로 결정했다. 앞으로 지도성과가 어떠한지 매우 주목된다"며 중학교 입학시험을 앞둔 당시 12살, 초등학교 6학년인 장남의 과외공부를 시작했다.
"1965년도 전기 중학입학시험이 오늘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 15분까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시작되었다. 어린 수험생들은 국어·산수·사생·자연·기타의 다섯 과목에 대한 필답고사를 첫 날 보는 것이다.
출두된 문제는 국어·산수가 33문제, 그밖에 세 과목이 각각 30문제로 모두 150문제였으나 그다지 쉬운 것은 아닌 모양이다. 조영이도 수험표 590번으로 제12고사장에서 남중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기차로 주안의 용화사를 찾아갔다. 법당에 들어가서 부처님·칠성님·장군님 앞에서 이번에 조영이가 남중에 꼭 합격하길 빌었다"고 적고 있다.
1966년 3월21일 일기에서는 "동회 부근에 사는 교육대학교 남학생으로 화진(장녀)이는 과외공부를 하기로 자신이 동무들과 함께 수소문하여 시작했다. 한달에 500원으로 비용도 많지 않았으며 앞으로 중학입학시험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저 혼자 찾아다니며 공부하려고 하는 모습이 신통하여 우선 오늘부터 보냈다"고 적고 있어 '적극적으로 공부'하는 큰 딸을 도와주려는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씨의 일기에서는 요즈음 대입 수능시험과 이전 학력고사를 치르는 시험장 풍경이 다르지 않음을 읽을 수 있다. 오히려 당시는 비평준화 정책에 따라 보다 어린 초등학생들부터 명문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공부 부담이 더 컸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근 '평준화 교육'이 마치 학력저하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획일적 교육'으로 매도되고 있다.
여기에 외국어고와 과학고 등 특수목적고에 이어 국제고등학교도 가세하면서 평준화 교육을 뒤흔들고 있다.
그러나 비평준화·엘리트 교육이 불러올 부작용도 함께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부작용은 어른들이 아닌 자라나는 동심속에 독버섯처럼 자라날 수 있다.
전교조 인천지부 이미숙 수석지부장은 "미래는 학력과 학벌이 중시되는 시대가 아니라 개인의 창의성이 경쟁력으로 발휘될 것"이라며 "명문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특목고 등의 입시 위주 교육이 오히려 개인의 창의성과 소질을 억압하는 획일적 교육"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