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창영초등학교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실험장이었다. 학생들이 만드는 어린이 신문이 국내 최초로 생겼으며, 학생용 골프장과 교사용 당구장, 어린이은행 등도 50여년 전에 이미 창영초교엔 있었다. 이때 학생들은 각종 클럽활동을 경험할 수도 있었다. 우리나라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는 창영초교 학생들이 맨 처음 조직했다.

   설마 그 당시에 그런 것이 있었을까 싶은 이 모든 일은 한 명의 교장에 의해 이뤄졌다. 백파(白派) 조석기(趙碩基·1899.12.9~1976.9.28).

   창영초등학교는 학생들이 집에서 신고 온 신발 채로 교실을 드나든다. 실내화로 바꿔 신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는 벌써 조 교장이 50년 전에 시행한 것이다. 전쟁 직후 실내화를 장만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아이들이 맨발로 교실바닥을 돌아다니다 거친 마루에 다치기라도 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조 교장은 집에서 신고 온 신발 그대로 교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학생들이 신문기자도 되고, 용돈을 은행에 넣어 스스로 관리하고, 다양한 클럽에 가입해 활동할 수 있게 했던 오래 전의 창영초교 모습은 지금 왜곡된 우리 교육 현실과 극명히 대비되는 부분이 많다.

   백파는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불린다. 백파는 1899년 12월9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원면 주곡동에서 한양 조(趙)씨의 4남3녀 중 맏이다. 고향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해 3·1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제일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나왔다.

▲ 1953년 6·25가 끝나고 교장실에서.
   이후 10여년간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교사로 재직했다가 부모님의 권유로 지금의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북의전을 2년간 다니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교육자의 길이 천직임을 깨닫고 의전을 중퇴하고 만다.

   백파는 1930년대 당시 격월간으로 발행됐던 문예지 '시원(詩苑)'에 시를 지어 발표할 만큼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기도 했다. 1935년 2월 시원 1월호에 발표한 백파의 시 '잔디의 유언'은 이렇다.

   '늦은 가을/쌀쌀한 바람이 벌판을 지나거든//말러진 나의 등에 불놓아 주소//어지러운 옛기억을 잊고/값헐한 환상을 버린 다음에/따뜻한 대지의 가슴 속에서/침묵의 겨울을 쉬이려 하는/마지막 남기는 부탁이외다'

   그는 경기도 부천 소래초등학교와 강화도 선원초등학교에도 있었고, 서울 매동초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의 첫 교장 부임지는 강화도 서곶 정상공립초등학교였다. 1943년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 1946년 교직원들과. 맨 앞줄 좌에서 네번째가 백파 조석기 교장.
   미군정은 당시 일제시대의 잔재와 사회 혼란을 슬기롭게 수습할 수 있는 해방 이후 첫 창영초교 교장으로 백파를 택했다. 백파는 1907년 창영초교 개교를 기준으로 제10대 교장에 해당된다. 그는 1946년 부임 이후 5·16이 일어난 해인 1961년까지 15년 동안 근무했다. 아직도 창영초교의 최장수 교장으로 남아 있다.

   백파는 15년 동안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창영초교를 해방 이후 근대교육의 온전한 산실로 만들고자 했다. 어린이들에게 자율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어린이 집회활동(대의원회·임원회 등)이 가능토록 했다. 또한 어린이신문 발행, 어린이방송국, 어린이우체국, 어린이은행, 야구·축구·수영·연극부 등 각양각색의 클럽도 만들었다. 각기 소질에 맞는 클럽활동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어린이신문은 6·25가 끝난 해인 1953년 10월 창간됐다. 지금의 대학신문과 같은게 54년 전에 초등학교에서 발간된 것이다. 이 신문은 국내 최초의 교내 어린이 신문으로 기록됐다. 주간으로 4면 가량이 발행됐던 이 신문은 어린이 기자들이 학교 안팎을 돌며 직접 취재하고 편집했다. 조판과 인쇄는 교내 인쇄소에서 맡았다. 인쇄소까지 뒀던 것이다. 이 신문은 매주 월요일 아침 일찍 아이들 책상 위에 놓여졌다.

▲ 창영초교 교기
   창영초교 45회 졸업생인 이인석(63) 인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은 이 때 어린이신문 기자와 연극부 활동을 했다. 5학년이었다고 한다. 이 부회장은 "매주 신문사 담당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함께 편집회의도 하고 취재했던 기억과 함께 비록 누더기 옷이지만 세계 각국의 전통의상을 만들어 무대에 올랐던 생각이 난다"고 회상했다.

   창영초교는 1956년 8월에 열린 전국수상경기대회에 참가해 평영 100에서 1·2·3등을 모두 휩쓸만큼 당시 전국수영대회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왕성한 클럽활동의 덕이었다.

   백파는 어린이은행을 설치한 동기로 "개인소비생활을 균형있게 하는 동시에 경제 자립을 위하여는 국민의 저축 정신을 높여 주어야만 한다. 오늘의 학교는 실천적 교육을 지향하여 보다 나은 실천인을 양성하는데 있다"며 "다액의 저금액을 나타냄이 유일의 목적이 아니라 올바른 경제인을 육성하기에 어린이은행이 필요한 것이다"고 밝혔다고 한다.

▲ 창영어린이신문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는 어린이 기자들과 담당 교사.
   당시 창영초교 운동장에는 606㎡ 규모의 '베이비 골프장'도 만들어졌다. 신축 교사(校舍)에는 당구대도 갖다 놓아 교사들이 즐기도록 했다. 당시 교감으로 함께 재직했던 최태호(아동문학가) 전 춘천교육대학장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걱정하는 교사들의 지적에 백파는 "(골프는)어린이들이 할 것을 어른들이 한 것 뿐이지, (당구는)선생이라고 하지 말란 법 있소? 나도 이제는 30은 치는 걸"이라며 유쾌한 위트로 받아 넘겼다고 한다.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도 백파가 있던 창영초등학교다. 1956년 당시 보이스카우트 세계연맹 총재였던 스파라이장군이 그해 12월 창영초교를 방문했던 것이 계기다.

   서성옥(73·남양주시 도농동) 전 서울시교육위원회 의장은 백파가 창영초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평교사로 근무했는데, 그는 "백파 선생님은 이 기간동안 미군청의 조선교육심의회의 회원과 대한교육협의회 부회장, 경기도교육협의회장, 인천초등교육회장, 인천교육연구소장, 한글학회 회원으로 활동했다"며 "해방 후 격동하는 현대사에서 교육이 나아갈 바를 고민하고 미래의 아이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생활교육을 강조하신 한국교육의 건국자"라고 평가했다.

▲ 회갑연때 모습.
   제자들과 지인들은 1959년 백파 선생의 환갑을 맞아 발간한 기념 문집 '노변야화'를 묶어냈다. 이 문집은 1970년대 당시 '주간 인천신문(경인일보 전신)'과 교육전문지인 '새교육'에 발표했던 논문, 1955년 터키에서 열렸던 제3회 세계교육자대회(WCOPT) 등에 참가했던 기행문 등으로 엮어졌다.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이 '노변야화'의 서문을 썼다. 외솔은 서문에서 "내가 재작년 창영초등학교 창립 50돌(1957년) 기념식에 참석하였을 적에 창영학교의 바깥스런 발전상과 아낙스런 진보상을 듣보고서 님의 교육공로가 그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의 큼에 감탄 경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 '노변야화'. 제자들과 지인들은 1959년 백파 선생의 환갑을 맞아 발간한 기념 문집 '노변야화'를 묶어냈다.
   조 교장은 노변야화에 실린 '노교사(老敎師)의 넋두리'에서 교육현실에 대해 "중학교 입시가 이제는 거지반 끝난 상 싶다. 좁은 문은 의연히 어린 가슴을 조리게 했었고 이에 따르는 희비극이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의 참다운 해결은 실로 전도요원의 감이 있다. 초등학교가 국민의 기초 교육을 담당한 완성 교육기관으로서의 엄연한 존립 가치를 상실하고 중학 입시 준비의 장소로 전락된 현실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현재의 한국에서는 오직 대학만이 완성 교육기관이요, 그 외의 초·중·고등학교들은 모두 입시 준비교로서의 가치밖에 없는상 싶다"라고 당시 교육현실을 꼬집었다. 당시에도 입시 위주의 교육이 심각했다는 얘기다.

   "교육이 잘 되고 잘 못되는 데 따라서 다른 모든 일이 잘 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 지역 사회의 잘 되고 잘못되는 것이 결정될 것"이라는 그의 교육철학은 여전히 유효한 외침이다.


<이창열기자·trees@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