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졸업반인 김인섭(25)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자기기 마니아'다. 휴대폰이나 PDA 등 최신 전자 제품이 출시되면 꼭 구입을 하거나 빌려서라도 시운전(?)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소위 '얼리 어댑터(Early Adapter·조기 수용자)' 격이다.

김씨는 그러나 최근 인터넷 사이트 접속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인터넷 사이트 여기저기에 뿌려놓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씨는 "인터넷 사이트마다 가입시 제한되는 아이디의 문자 제한이라든지 '문자 + 숫자'로만 해야 하는 각종 제한 때문에 여러개의 아이디를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 경우 어떤 사이트에 어떤 아이디로 가입을 했는지 기억하기 힘들어 애를 먹곤 한다"고 했다.

회사원 배정택(30·고양시 일산동구)씨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PDA의 일일 스케줄을 가장 먼저 확인하는 '디지털 족'이다. 이제는 휴대폰, PDA 등의 첨단 디지털 장비를 이용해 스케줄을 관리한다.

하지만 며칠 전 술에 취한 채 탄 택시에서 PDA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큰 곤혹을 치렀다. 주요 거래처의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거래 은행의 모든 정보를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업무 마비는 물론 간단한 은행거래조차도 할 수 없었다.

고객들의 전화번호나 은행 계좌번호, 각종 인터넷 뱅킹 시스템들을 PDA에 저장해 놓고 따로 적어두거나 외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분신과도 같은 PDA를 잃어버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발만 동동 굴렀다"면서 "이제부터는 중요한 전화번호나 계좌번호 정도는 외워놔야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현대인 대부분이 이른바 '디지털 치매'로 고민하고 있다. '디지털 치매'란 PDA나 휴대폰 등의 디지털 장비에 기억을 의존하다보니 기억력이 떨어지고 무기력해지는 상태를 일컫는 말. 노래방 기기가 없이는 애창곡 하나 부를 수 없고, 중요한 기념일이나 회의는 PDA가 챙겨 줘야 할 정도로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곤 한다. 뿐만 아니다. 집 전화는 물론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기억력이 떨어지고 손으로 글을 쓰는 게 어색해지는가 하면 계산기가 없으면 암산은커녕 간단한 계산조차 하지 못한다.

컴퓨터나 휴대폰이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면서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넣어두지 않아도 되게 됐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도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 세상에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혹은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 수많은 정보를 습득하려 애쓴 덕분(?)에 생겨난 반대 급부다.

실제로 최근 병원 정신과에는 디지털 장비에 중독돼 "인터넷이나 휴대폰 등의 도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호소하는 환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이외에도 디지털 시대를 맞아 달라진 생활의 병폐는 많다. 버스를 탈 때 교통카드 대신 아날로그 식으로 현금을 내면 왠지 '구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GPS나 내비게이션이 없는 자동차로는 낯선 길을 찾아 나서기 어렵다.

최근 취업 포털 인크루트(www.incruit.com)와 리서치 전문기관 엠브레인이 직장인 2천3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1천281명(63%)이 건망증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20~30대 직장인 중 60% 이상이 건망증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건망증을 겪는 이유에 대해 이들 중 261명(20.4%)은 '휴대폰·PC 등 직접 기억할 필요가 없는 환경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이런 심각한 현대인의 병폐로 등장한 디지털 치매가 노인들이 흔히 겪는 알츠하이머병(치매)과 같은 질병일까? 답은 'NO'. 정신과 전문의들은 "기억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 생기는 디지털 치매는 치료가 반드시 필요한 '병'과는 다르다"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치매가 뇌의 하드웨어 자체가 망가지는 병이라면 디지털 치매는 집중력과 관심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병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 버튼 하나로 기억력과 사고능력을 대신해주는 디지털 장비들이 '기억하려는 노력과 습관'을 필요 없게 만들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디지털 치매에서 벗어나려면 적절한 휴식과 기억력을 키우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충고한다. 뇌 질환이 아니라, 정보 과다로 인해 뇌가 주변 정보를 자꾸 밀어내는 현상이기 때문에 마음을 편히 먹고 느긋하게 생각하면서 사는 태도가 필요하다. 삼성서울병원 윤세창 교수는 "전화번호, 이름, 물건의 명칭, 시구 등 일상생활에 관련된 내용을 가능한 한 많이 암기하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며 "가능하면 손으로 쓰고, 직접 계산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건망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