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보디아 시엠립 외곽으로 이전개장하는 아키라의 지뢰박물관은 잔혹했던 내전의 역사를 모아놓은 곳이다.
전쟁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데려간다. 피땀으로 일군 삶의 터전도 송두리째 파괴한다. 상처가 새겨지는 건 한 순간이지만 아픔은 오래 간다. 6·25전쟁을 겪은 우리가 아직도 아파하는 것처럼 전쟁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전쟁이 동아시아를 훑고 지나가며 남긴 상처 역시 얕지 않았다. 그래도 그 절망의 늪에서 희망을 건져올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 아키라가 지뢰박물관에 모아놓은 각종 무기들.  
# 지뢰박물관과 아키라

지난 5월 31일 캄보디아 시엠립 시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달려 내전의 상처를 모아놓은 '지뢰박물관(Landmine Museum)'에 도착했다.

지뢰박물관은 6월 중 이전개장을 앞두고 마무리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제는 새로 진 번듯한 건물로 이전하게 됐지만 이 박물관은 원래 크메르루주였던 아키라(38·Akira)가 시엠립 시내에서 지뢰를 모아놓았던 곳에 불과했다. 자신이 묻었던 지뢰를 찾아 제거하는 아키라의 기구한 사연이 전 세계에 알려진 뒤 캐나다와 영국 등의 지원으로 지뢰박물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 쭉 늘어선 포탄이 마치 예술품인 양 관람객들을 맞고 있었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상자 안엔 지뢰와 각종 포탄이 가득했다.

가장 비인간적인 무기라고 불리는 발목지뢰는 똬리처럼 엮여 있었고, 대전차지뢰 뚜껑은 나무에 매달려 재떨이가 돼 있었다.

▲ 지뢰를 찾아 제거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캄보디아 지뢰박물관장 아키라.
잠시 뒤 아키라가 나타났다. 그는 입양한 장애아들과 함께 인근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키라는 "1달러면 생산하는 발목지뢰를 제거하는 데는 1천달러가 든다"며 자신이 해체한 지뢰의 종류와 위험성에 대해서 설명했다.

지금은 지뢰제거에 인생을 바치고 있지만 사실 아키라는 크메르루주의 병사였다. 그는 다섯살 때 폴 포트 정권에 부모를 잃고, 10살 무렵부터 크메르루주 캠프에서 소총을 들었다. 이후 20년 가까이 전쟁터를 누볐던 그에게 지뢰는 친구이자 목숨을 지켜준 은인이기도 했다.

그랬던 아키라가 10년 전부터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 지뢰매설지에서 지뢰를 찾아 제거하고 있다. 또 지뢰에 팔 다리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입양해 돌보고 있다.

그는 "캄보디아에 있는 지뢰를 모두 없애려면 아직도 수십년은 더 걸릴 것"이라며 "지금도 밭을 매다가 목숨을 잃거나 장애인이 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전쟁은 끝나도 그 여파는 계속되고 있는 게 캄보디아의 슬픈 현실"이라고 말했다.

# 적과의 동침
▲ 과거 베트콩이었던 위(오른쪽)와 미군 부대 사업가였던 김춘상씨. 한때는 적이었지만 이젠 세상에서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가 돼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6월 2일 베트남의 휴양도시 붕따우에서 만난 김춘상(73)씨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도 베트남에 있었다. 당시 김씨는 미국7사단 11여단 부대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스팀마사지 사업을 했었다고 한다.

1992년 베트남과 수교를 재개한 이후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한국식당을 운영하는 김씨에겐 한 베트콩과의 남모를 인연이 있었다. 그의 식당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위(56)가 바로 그 베트콩이다. 베트콩부대에서 대포사수였던 위는 김씨가 있던 미군 부대로 매일 대포를 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김씨는 "그렇게 대포를 쏴댔던 위와 내가 이렇게 지낼 줄은 몰랐다. '적과의 동침'이란 말을 이럴 때 사용하는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김씨와 위가 함께 지낸 시간은 벌써 10여 년. 이제 두 사람은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가 됐다. 김씨는 "술을 한 잔 하면서 베트남전쟁 얘기를 하다보니 마주보며 싸웠던 부대에 서로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며 "하지만 다 지난 일이다. 지금은 위가 없으면 외로워서 못살지 못살아…"라고 말하며 위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은 얼마전 자신들이 있었던 부대 흔적을 찾아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위는 "김씨는 평생 함께 하고 싶은 친구이자 은인"이라며 "한국과 베트남은 과거 서로 총을 겨눴던 적이 있지만 이젠 형제 같은 나라"라고 말했다. 이에 김씨는 "가장 친한 친구인 위가 있기에 계속 베트남에서 살 생각"이라며 "죽기 전엔 꼭 위에게 뒷정리를 잘해달라고 부탁한 뒤 떠날 것이다"고 말하며 위와 부둥켜안았다.

# 용서 말고는 해줄 게 없다
▲ 캄보디아의 현직 경찰인 티에의 가족은 크메르루주에게 학살당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크메르루주와 친구가 됐다.
캄보디아 경찰인 티에(41·Thea)는 얼마전까지 크메르루주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고 한다. 남동생과 여동생, 아버지, 삼촌, 이모, 고모가 모두 크메르루주에게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홉살이었던 티에는 크메르루주를 피해 수도 프놈펜에서 베트남 옆인 프레이뱅(Preyveng)까지 피란을 떠났다.

도중에 크메르루주에 붙잡혀 가족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모습을 그 어린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이후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그는 정부군이 됐다. 티에가 당시 근무했던 곳이 크메르루즈가 마지막까지 극렬하게 저항했던 국경마을 알롱뱅이다. 티에는 "억울하고 너무 화가 나지만 어쩌겠냐. 당시 우리는 너무 무지했다"고 지난일을 회상했다.

내전이 끝나고 크메르루주가 지구상에 사라진 뒤 티에에게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가족의 원수이자, 성인이 된 뒤엔 총부리를 겨눴던 크메르루주와 친구가 된 것이다. 지난 5월 30일 찾은 알롱뱅에서 티에가 만난 친구들은 대부분 과거 크메르루주였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악수를 하고 얼싸안는 티에와 친구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악연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티에는 "가끔은 이 친구들에게 왜 그렇게 잔혹하게 죽였는지 묻고 싶을 때도 있다"며 "한데 물으면 뭐하겠나. 그저 시켜서 그랬을 뿐일텐데…"라며 말을 줄였다. 이어 "끔찍했던 학살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이제는 적과 친구의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가난한 캄보디아를 일으키기 위해선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함께 뭉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