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1일 얼굴에 채 여드름이 가시지 않은 25살의 청년에게 잊지 못할 날이다. 그동안 선원생활과 연안부두에서 작은 자동차 공구상을 하며 틈틈이 모아둔 돈으로 자신의 가게를 여는 날이기 때문.
청년은 인천 중구 해안동 4가3에 있는 허름한 창고 하나를 개조해 한진상사(韓進商社)란 간판을 내걸었다. 비좁은 공간에 미군이 쓰던 트럭 한대로 시작하는 사업이었지만 내가 번 돈으로 나만의 가게를 갖게 된다는 마음에 뿌듯하기만 했다. 한국 수송(輸送)의 거목(巨木)이라 불리는 고(故) 조중훈(趙重勳·1920~2002) 한진그룹 회장의 첫 발은 이렇게 인천의 한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된다.
한진그룹의 모태가 된 옛 한진상사 건물은 인천시 중구 해안동 2가 9에 자리잡고 있다. 그간 인천에서 진행된 토지구획사업으로 주소는 바뀌었지만 건물 자체는 원형 그대로다.
한진상사 자리는 기계식 저울을 만드는 인일공작소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인일공작소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쇳가루와 기름 냄새가 섞여 코를 자극했고 군데군데 쌓여 있는 기계류와 고철 더미가 눈에 띄었다. 60여평 남짓 돼 보이는 어두컴컴한 이곳에서 지금의 한진그룹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2대째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염태진(65)사장은 바로 이 곳 해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천 토박이다. 81년 사망한 그의 아버지가 인일공작소란 간판을 1945년 해방 이전에 내걸었으니 한진상사보다 먼저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한 셈이다.
염 사장이 기억하는 조 회장은 소탈하고 부지런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조 회장은 젊은 시절부터 사업을 하려면 외형상 듬직해 보여야 한다며 큰 솥에 돼지고기를 넣어 삶아 먹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이를 염 사장 가족과 나눠먹기도 했으며 인천앞바다에서 잡은 민어와 농어 등으로 끓인 매운탕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조 회장은 신용을 목숨으로 여기고 한진상사를 이끌어 나갔다고 한다.
염 사장은 '미스터 신용'으로 불린 조 회장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했다.
6·25 전쟁이 시작되면서 자신이 소유했던 트럭과 장비 등 모든 것을 군수품으로 징발당한 조 회장은 다른 사람의 트럭을 임차해 한진상사를 운영해야만 했다. 인천 곳곳에 흩어져 있던 트럭 소유자들을 모아 자동차에 HJT란 한진상사 마크를 달고 인천항을 통해 전달된 미군 캔 맥주 등의 군납품을 부평 미군기지와 의정부 일대로 수송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정부로 물건을 배달하러 간 트럭 기사가 중간에 물건을 빼돌린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에는 전국이 어수선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트럭 기사가 다른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염 사장은 "조 회장이 6·25 후 신뢰를 쌓았던 미군 초급 장교들이 베트남 전쟁 당시 미 국방부 고위 관리로 진급하면서 한진이 베트남에서 물류사업을 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줬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이렇듯 신용과 성실함으로 한진을 일궈냈다는 게 염 사장의 기억이다.
조중훈 회장은 1920년 2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선친을 비롯한 할아버지 등 선대는 대대로 인천 중구 용유동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휘문고보 1학년을 중퇴하고 경남 진해에 있는 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수료한 후 1937년 화물선 선원생활을 시작한다. 첫 직장이었던 것이다.
선원 생활을 하며 전 세계를 돌아본 청년기 경험이 향후 조중훈 회장이 운송, 항만, 항공 등 물류사업에 뛰어들게 한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그가 인천에서 생활한 것은 1945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10여년이었지만 이 시절 인천과의 인연으로 지역 대학인 인하대학교를 인수하고 인천항 민자부두 사업에 참여하는 등 많은 사업을 인천에서 벌이게 된다.
그가 쓴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는 그가 왜 인천을 첫 사업의 근거지로 택했는지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조 회장은 자서전에서 '인천은 경부·경의선 철도의 개통으로 서해안 개항장으로의 우위를 부산항에 빼앗긴 느낌이 있었지만, 서쪽으로 중국과 상대하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대중국무역 기지로서는 단연 수위(位首)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 '항내(港內)가 광활하고 수심이 깊으며, 크고 작은 섬들이 내외항(內外港)을 감싸고 있어 풍파(風波)와 동결(凍結)이 적은 천혜(天惠)의 항구였던 것이다'라고 썼다.
조중훈 회장은 이렇게 인천을 수입항으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춘 항구도시로 평가해 자신의 사업 근거지로 삼았다.
특히 그는 인천에서 전국 최초로 인천~서울을 오가는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해 당시 인천 시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서울을 가는 시민들은 매일 콩나물 시루같은 만원 버스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를 본 조 회장은 1961년 8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지정좌석 방식의 버스를 인천~서울간 노선에 도입하게 된다.
주한 미군에서 2년마다 교체하는 통근용 일제 버스를 불하받아 시작한 사업이었다. 처음에는 기존 업계의 반발로 번듯한 새 도로를 놔두고 서울에서 출발, 김포 사거리 뒷길을 따라가다 배다리를 거쳐 동인천으로 나가는 비포장길로 다녀야 했기 때문에 적자를 면치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중훈 회장의 끈질긴 협상 끝에 6개월 만에 새롭게 포장된 경인가도를 달릴 수 있는 통행권을 정부로부터 따냈고 인천시민들은 편하게 앉아 서울을 오갈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됐다.
향후 이 좌석버스 사업은 인기를 얻어 조 회장이 한진고속을 만들 수 있게 한 견인차 역할을 한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당시만 해도 서울을 가려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기차 대신 버스를 많이 이용했는데 사람이 많아 짐짝처럼 실려 다녔다"며 "그나마 조 회장이 만든 좌석버스 때문에 서울 가는 길이 편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렇게 조중훈 회장은 인천에서 갈고닦은 사업 기반을 통해 1966년 베트남전쟁 당시 미 군수품 수송용역계약을 체결해 제2의 도약기를 이뤘고 이를 발판으로 1967년 동양화재보험을 인수하고 1968년에는 대한항공공사(KAL)를 인수해 당시 국내 3대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가 대한항공을 맡게 된 것은 어쩌면 '한진'이라는 이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세계를 향한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뜻과 항공사는 너무나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당시 KAL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뒤처진 회사였다. 보유 항공기 8대. 이 중 DC-9 제트기를 제외하면 수명이 다해 더이상 날기 어려운 비행기가 대부분이었다. 금융부채 27억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도 경영하기 어려운 이 회사를 조 회장에게 떠넘겼다.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해 보는 게 소망이라면서. 청와대 독대자리에서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한참을 망설이던 조 회장은 KAL을 맡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KAL은 세계 유수의 항공사가 됐다.
1945년 인천의 한 허름한 창고에서 트럭 한대로 시작해 지금의 글로벌 한진을 일궈낸 고(故) 조중훈 회장.
옛 한진상사 자리인 인일공작소의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맡았던 고철과 기름 냄새가 지금의 한진그룹을 있게 한 조중훈 회장의 역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니 역한 쇠붙이 냄새가 향기로 남는 듯하다.
<김명호기자·boq79@kyeongin.com>김명호기자·boq79@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