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차영(金次榮·1922~1997)은 1940년 대를 인천에서 보낸 시인이자 언론인이다.
강화 길상면 출신의 그는 당시 이름을 날렸던 문인 임화(林和), 오장환(吳章煥), 현덕(玄德), 배인철(裵仁哲)과 교류하며 문학적 자양분을 쌓았다. 1945년 11월에는 지역 문인들과 힘을 모아 동인지 '문예탑'을 발간하기도 했다. 나중에 대중일보 문화부장을 역임한 시인 윤기홍(尹基洪), 동화작가 우봉준(禹奉俊),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한상억(韓相億) 시인 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는 그동안 최초의 문예지로 알려진 '예술부락'보다 2개월 앞선 것이다. 또 김차영은 언론인으로서 첫 발을 인천지역 최초 일간지 대중일보에서 시작했다. 당시 대중일보 편집국장은 극작가 진우촌이었다.
인천에서 그 20대 청년이 남긴 발자취는 작지 않다. 하지만 그 흔적을 더듬어 찾는 건 쉽지 않았다.
1991년 '학산문학' 창간 때 김차영과 좌담했던 윤영천 인하대 교수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수소문 끝에 김차영과 1950년대 동인활동을 했던 김규동(81) 시인에게서 소한진(70) '문예한국'주간을 소개받았다. '문예한국'의 전신은 '시와 의식'(1975년 발간)으로 모더니즘 수용잡지를 표방했다. '문예한국'은 1997년 봄호 표지작가로 김차영을 선정, 그의 시 10편과 시론 1편을 실었다.
지난 11일 오후 1시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에 있는 주택 3층 서재에서 소한진 주간을 만났다. 소 주간은 김차영과 약 30년 동안 친분을 가졌고, 그가 세상을 뜨기 직전 조치원에서 만났다고 했다.
김차영 얘길 꺼내자 소 주간은 집안 이곳 저곳을 뒤진 끝에 '문예한국'1997년 봄호를 찾아 내밀며 말했다.
"1974년 김차영 선생과는 동양통신 문화부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내 첫 시집을 들고 청진동에 있는 사무실에 찾아갔어요. 그 전에도 몇 번 만났지만 정식으로 만난 건 그날이 처음이었지요. 50대 나이였지만 키도 크고, 멋쟁이였어요. 소주 2병 정도는 마셨구요. 선생은 동양통신에서 20년, 상공회의소에서 10년 정도 근무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퇴직할 때까지 인근 술집에 단돈 100원 외상이 없었어요. 한 번은 청와대 부근에 있는 집에서 점심을 대접한다고 저를 초대한 적이 있었어요. 70평이 넘는 근사한 집이었어요. 그런데 토스트 한 조각 주고 말더라구요. 그런 점심대접은 처음이었어요."
이런 김차영은 해방 이후 국내 최초의 문예지를 인천에서 만들었다. 그는 당시를 1991년 있었던 '학산문학' 창간좌담에서 소상히 회상한 바 있다.
"광복되던 날 밤에 저는 쇠뿔고개(牛角洞, 현 창영동) 조금 못미쳐 영화학교(永化學敎)에서 철로변으로 가는 쪽에 있었던 송종호의 집으로 갔어요. … 아마 그날에는 8~9명 정도 모였을텐데, 거기서 동인지 발간이 발기되었고, 약 일주일 뒤에 지금 기독병원 아래에 허름한 사무실을 마련하고 '신문화협회'라는 걸 결성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약 한 달간이나 고생한 끝에, 골필로 써가지고 '문예탑'·'동화세계' 등을 낸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모두 미쳤던 거지요."
김차영은 같은 해 12월께 인천문학동맹 결성에 참여했고, 이듬해에는 인천 최초 일간지로 1945년 10월 창간된 대중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
김차영은 인천에서 고등 보통학교 입시 재수를 했고, 당시 월북 소설가 현덕(玄德·1909~?)을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녔다고 한다. 현덕은 인천 부근에서 성장기를 보낸 아동문학 작가이고, 인천문화재단은 최근 그를 '2007 대표인물 조명사업 대상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현덕은 제가 일찍이 사귀었습니다. … 그가 '남생이'를 쓸 무렵, 저는 그때 고보 입시를 준비하던 재수생이었는데, 지금 자유공원 아래 박물관 자리에 있던 도서관엘 함께 오르내리면서 그를 볼 기회가 잦았습니다. … 도서관 문을 나서선 도산동(桃山洞), 지금의 도원동 산비탈 빈민소굴 같은 데로 줄곧 걸어 다녔습니다."
김차영은 현덕을 통해 월북문인 임화(林和), 박찬모(朴讚謨), 김태진(金兌鎭), 오장환(吳章煥) 등과 교류를 맺었고, 좌익계열 작가들과의 인연은 한국전쟁 때까지 이어졌다.
김차영은 1941년에는 문예지 '신시대(新時代)'에 '야영(夜詠)' 외 5~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해 1월 창간된 '신시대'는 친일성향의 대중 잡지였고, 이 잡지에는 일본어로 된 글이 실렸었다.

일제시대 조선 엘리트들이 많이 갔던 도쿄대(동경제국대), 와세다대, 메이지대(명치대) 등 3개 대학에 비해 리쓰메이칸 대학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학교였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히다치 제작소(日立製作所), 타나카공업주식회사(田中工業株式會社) 등에서 근무했다.
이런 이력에서도 드러나듯 김차영은 친일과 좌·우익을 넘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학평론가 김양수(74)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제 통치시기에는 학교나 기관 등이 일본 대학 유학생을 선호했기 때문에 엘리트들은 일본에 건너가 공부했지요. 주로 동경제대, 와세다대, 명치대학 등을 다녔고. 이 대학교에 갈 실력이 안 되거나, 고학생들은 다른 학교를 선택해 다니기도 했어요. 김차영 선생도 이 두가지 경우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돌아와 학교 선생을 하지 않은 게 조금 이상하기는 해요."
해방 뒤 김차영은 동인지 '문예탑'과 함께 '시와 산문'을 펴내는 등 본격적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1·4 후퇴로 인천을 떠나 부산에 내려갈 때까지 김차영이 보인 행적을 두고 김양수씨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였다고 전했다.
"김차영 선생은 해방 후 현덕을 따라다니면서 자연스레 좌파 문인들과 어울렸습니다. 훗날 서울서 만난 김차영 선생이 제게 이런 말을 했지요. 용동 술집에서 술을 거하게 마시고 나가는 데 한 좌익 문인이 그에게 배인철은 속이 비었고 이경성이는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곧 숙청하겠다고 말했다고 하더라구요. 배인철은 시를 쓰는 청년이었고, 이경성은 시립미술관장을 하시던 분이었어요. 이 말을 들은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좌익 모임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김차영은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기 좌익 계열 작가들로 구성된 조성문학가 동맹에 참여해 활동했다.
서울수복 후 조선문학가 동맹에서 활동한 시인 조병화, '그리운 금강산' 작사가 한상억은 '부역문인'이라는 이유로 청년단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지만 김차영은 피란민들과 함께 인천에 돌아왔다고 한다.
김양수씨는 이 말을 들려주면서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1951년 '1·4후퇴'를 겪으며 김차영은 인천을 떠나 부산서 피란 생활을 했고, '후반기(後半紀)' 동인에 참가해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차영은 동양통신 기자, 대한상공회의소 출판부장 등을 역임했다.
조봉제(80) 전 동아대 교수는 김차영을 '에고이스트'였다고 전했다.
조 교수는 "남 생각을 잘 안했어요. 자존심이 강했죠. 문단에서 적이 많았어요. 실력도 없이 문단에 기웃거리기만 하는 이들을 보면 사람 취급도 안했거든요"라고 말했다.
김차영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
퇴직한 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작은 문구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청주에 있는 한 전문대학에 취직한 아들을 따라 내려갔다는 것 정도다.
그나마 소한진 주간의 말에서 김차영의 말년을 짐작할 수 있다.
"돌아가시기 1년 전쯤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김차영 선생은 조치원역 부근에 있는 15평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어요. 집안 이야기를 일절 안 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왜 아들 집을 나와 혼자 사는지 알 수 없었지요. 일본에서 들여온 불경을 번역해 용돈벌이를 하셨어요. 특집(문예한국 1997년 봄호)을 내고 1~2년 뒤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차영은 해방 후 최초의 동인문예지 발간에 참여했고, 인천 최초 일간지 대중일보에서 근무했다. 특히 당대 최고의 명망있는 문인들과 어울렸다.
일제시기와 해방공간에서의 좌·우 대립, 그리고 전쟁, 산업부흥기 등을 거치면서 그가 걸은 발자취를 하나씩 찾는 작업은 곧 숨겨진 인천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김명래기자·problema@kyeongin.com>김명래기자·problema@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