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정재홍 열사의 손자 해영씨가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할아버지 대신 애국장을 받았다.
   지난 15일 제62회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세종문화회관. 노무현 대통령과 바로 마주보는 자리에 선 정재홍(鄭在洪) 열사의 손자 해영(68)씨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목이 멨다. 집을 나설 때부터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결국 대통령에게서 할아버지의 애국장(건국훈장 중 넷째 등급)을 건네받은 뒤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벌써 돌아가신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누구 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세상이 할아버지의 의로운 행동을 알게 된 겁니다."

   정재홍 열사. 정 열사는 구한말, 인천에 사립교육기관인 '천기의숙'(또는 인명의숙)을 설립한 애국계몽운동가다. 또 대한자강회 인천지회 지회장을 맡으면서 인천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선도했다.

   특히 친일파 박영효의 귀국 행사장에서 국권침탈에 분개해 육혈포(권총)로 자신의 배를 쏴 자결한 애국지사다.

   인천은 정 열사가 태어난 고향이 아니다. 정 열사는 서울 출신이다. 그렇지만 사재를 털어 교육기관을 세울 정도로 정 열사의 인천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럼에도 인천은 최근까지 정 열사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 인천학연구원이 2005년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김형목 박사에게 '정재홍 선생의 애국계몽운동과 의열투쟁'이란 연구과제를 주면서 비로소 재조명 작업이 시작됐다. 정 열사가 자결한 지 100여년 만의 일이다.

   정 열사의 정확한 출생일은 밝혀진 바 없다. 다만 자손들의 "1907년 자결할 당시 나이가 39~41세 정도였던 것으로 안다"는 추측으로 미뤄, 1866~1868년생인 것으로 보인다.

   정 열사가 인천과 연을 맺은 것은 1890년대 후반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사편찬위원회 보관 자료에 따르면, 정 열사는 1897년 12월 31일 창립한 객주단체 '인천신상회사'의 구성원으로 기록돼 있다.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은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했다. 개항장 인천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 일본 사람들은 자국민이 인천에 이주할 수 있도록 황태자 결혼기념 유치원을 세우기도 했다. 서울에서 국민교육을 강화해 독립의 기초를 다지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런 취지로 1906년 대한자강회가 설립됐다. 이듬해 1월 인천에도 대한자강회 인천지회가 설립됐는데, 정 열사가 지회장을 맡았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의 활동은 관내 교육기관 설립·지원 등이었다. 정 열사는 같은 해 사재를 털어 인천 우각동(지금의 창영동)에 천기의숙을 세웠다. 천기의숙에선 단순 실력배양 차원의 교육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고일 선생은 인천석금에 "제령학교 뒤에 설립된 민간 학교는 인명의숙(천기의숙)이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저 일진회와 투쟁한 자강회 인천지회장이며, 박영효를 암살하려다가 사상 팔변가란 시를 남기고 자결한 정재홍씨다. 이 학교의 특색은 정치 사상을 고취했다는 점이다"라고 적었다.

   구한말, 인천에서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에 맞서 싸운 단체는 신상회사와 미곡상회였다. 이들 단체는 사립학교나 야학의 설립을 지원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동참했다.

   정 열사에게 신상회사와 이 회사를 세운 서상빈은 든든한 버팀목이자 교육구국운동을 함께 벌인 동지였다.

   "신상회사 임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연동맹회도 그(정 열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황성신문(1907년 5월 3일)과 "서상빈은…(중략),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 정재홍과 함께 지회 운영도 주도하였다"는 대한자강회 월보(1907년)에도 잘 드러나 있다.

▲ 정 열사가 자결하기 전 어머니에게 남긴 유서.
   정재홍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은 '박영효 저격 미수사건'이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등은 1907년 6월 30일 서울 북부지역 농상소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대서특필 보도했다. 이곳에서 고관대작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친일파 박영효의 귀국 환영회가 열렸는데, 정 열사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배에 권총을 쐈다.

   "금릉위 박영효씨 환영회를 베푼 사건은 다아는 바이거니와…(중략), 정재홍씨가 권총을 가지고 왔다가 자기 배에 대고 쏘아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일반 회원들은 당황하여 정씨를 어깨에 메어 '대한의원'(대한적십자병원)으로 보내고 일반 회원은 여흥을 마치지 못하고 폐회하였다. 오후 9시에 마침내 숨을 거두니 그가 지사 정재홍씨이다. 슬프다! (제국신문 1907년 7월 2일자 제2445호)"

   정 열사의 자결은 일본의 침략에 맞선 격렬한 저항으로 평가받는다. 사상팔변가(思想八變歌)엔 그의 저항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1변)나라하고 상관된 공본되게 미운 놈 한매에 쳐 죽여서 이내 분풀이로다. (제2변)잘못쳐서 못 맞치면 속절없이 나만 죽네. (제3변)육혈포로 얼른 놓고 빨리되면 일 없도다. (제4변)육혈포를 당장 쏘았네. (제5변)남 죽이고 너 살자면 천 리에 못 되리로다. (제6변)죽이고서 나도 죽자. (제7변)한 사람 남 죽이고, 한 사람 나 죽으면 둘이 원수될 뿐이라. (제8변)한 사람 나만 죽어 전국이 감동하며, 이 몸에 영화되고 국가에 행복일세."

   정 열사는 박영효 저격미수사건 전에도 자결을 결심한 적이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였다. 그러나 홀로 남겨질 가족과 국가의 장래를 걱정해 자결을 실행하진 못했다.

   정 열사가 자결한 뒤 유족으로는 부인 최성녀씨와 종화(당시 12세)·종원(당시 9세) 형제가 남겨졌다. 성녀씨의 오빠는 3·1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성모 목사다. 종원씨는 우리나라 초창기 영화·연극계의 중추인물로 꼽히는 정암이다.

▲ 정재홍 열사의 자결 소식에 각계에서 의연금 모금운동과 함께 추도회를 열었다. 사진은 미국에서 발간되던 공립신보에 실린 정 열사 추도회 예고 기사.
   종화씨는 아버지가 자결한 뒤, 한 중국인의 손에 이끌려 상하이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대학을 다닌 것으로 인천석금은 적고 있다. 또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명학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임시 정부 요인으로 있다가 광복을 10년 앞둔 51세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 열사 가족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필요하다는 학계의 지적은 이 때문이다.

   정 열사의 자결은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형목 박사는 정 열사에 대한 연구자료에서 "그의 의거는 곧바로 젊은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종양위를 전후한 결사회 활동은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인천항 주민들은 일본인 가옥에 대한 방화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정 열사 자결이) '공립신보'에 보도됨으로써 해외 한인사회는 커다란 충격과 아울러 잊혀져가는 민족애·조국애를 분발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했다.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정 열사는 인천의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늦었지만 그의 의로운 행동이 조명받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김장훈기자·cooldud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