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홍 열사의 차남 종원씨의 예명은 정암이다. 그는 우리나라 초창기 영화·연극계의 중추인물로 꼽힌다.
정암은 1925년 일본유학 후 귀국해 고려영화제작소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무성영화 '쌍옥루' '낙화유수' 등을 제작했으며, 연기자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보다 한 해 빨리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정암은 1926년 인천에 와서 극작가 진우촌, 무대장치가 전우전 등과 함께 연극모임 '칠면구락부'를 창설했다. 칠면구락부는 지역 연극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암은 언론인 고일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는 정암의 아버지인 정 열사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 있다. 고일은 '인명의숙 설립자 지사 정재홍'이란 글을 인천석금에 실어 후세가 정 열사를 잊지 않도록 했다. 정암은 늘 아버지가 묻힌 장소를 찾지 못해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 유골을 찾지 못한 채 1977년 78세의 나이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