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는 격동했던 세월의 역사였다. 격동했던 역사의 현장에는 항상 경인일보가 있었고 당시의 생생한 역사는 현장을 뛰어다니던 기자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기록됐다.
■ 격동의 역사 현장엔 경인일보가 있었다(창간~1990년대)
경인일보는 1960년 9월 인천시 중구 사동에서 '인천신문'으로 창간, 경기 인천지역 최초로 언론사로서 그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경기연합일보와 연합신문, 경기신문 등 몇차례의 제호 변경을 거쳐 지난 1982년 지금의 경인일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천에서 수원시 교동으로, 그리고 현재의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으로 사옥을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격동의 시대를 거쳐온 만큼 경인일보가 걸어온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5·16쿠데타 직후에는 3개월간 검열을 받는 수모를 겪었고 10·26사태 이후 5공화국 아래에서는 정권찬양 기사가 하루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당시 1960년 9월1일 창간호에는 이같이 어두운 사회현상을 그대로 지면에 반영했다.
제호가 '인천신문'으로 창간됐던 창간호 1면에는 '살길 찾는 勞者(노자)의 絶叫(절규)'라는 제목으로 머리기사가 실렸다. 당시 인천의 미군유류 공급업체 PLO 노동자들은 최저 생계비의 3분의1 밖에 안되는 열악한 임금체계 개선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30여명이 부상을 당하고 40여명이 구속되는 불상사가 발생되기도 했다.
70년 10월1일 연합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고 73년 9월 1일에는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 2개지를 흡수 통합해 '경기신문'으로 제호를 바꾼다. 이후 경기신문은 10월 유신과 육영수여사 암살, 10·26사태, 12·12사태 등으로 70년 격동기를 독자들과 함께 고민했다.
5공 정권과 함께 등장한 80년 '언론통폐합'의 위기를 흔들리지 않고 이겨낸 경인일보는 82년 3월1일 현재의 '경인일보'로 제호를 변경하게 된다.
당시 84년 LA올림픽에서 날아든 금메달 낭보가 경인일보 호외로 제작돼 시민들을 환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가 하면 86년 4월까지 납을 녹여 연판을 구워 신문을 인쇄하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윤전기가 독립기념관에 보관 전시중이다.
또 이때는 용인 오대양 신도 집단 자살사건과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특종 보도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90년 7월에는 최초로 수원역 광장에 뉴스속보 전광판을 설치하고 97년 7월에는 석간신문에서 조간신문으로 변경하며 독자들의 요구에 맞춰 전면 가로쓰기를 실시한다.
이어 98년 7월에는 경인지역 최초로 인터넷 온라인 신문(http://www.kyeongin.com)을 오픈했다.
■ 새로운 도약, 동영상 서비스 제공(~현재)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했던 뉴스를 독자들이 요구하는 풍성한 정보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독자가 쉽고 간결하게 기사를 읽을 수 있도록 디자인과 로고 등 편집면에서 대대적인 혁신이 일어나게 된다. 또 인터넷 경인일보팀이 구성돼 인터넷을 통한 정보 전달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지금은 국내 최고 수준 양질의 서비스 제공을 자랑하고 있다. 시시각각 일어나는 사건·사고와 각종 정보, 그리고 각 기관 및 관공서의 인사와 동정이 홈페이지에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토요일자 신문인 경인플러스 타블로이드판을 제작, 지면에 못담았던 재미난 뒷얘기나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사건 사고 등을 집중 분석해줘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고 있다.
경인일보는 또 취재 현장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와 지면기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캠코더에 담아 UCC로 제작, 독자들의 궁금증을 더욱 자세히 해소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