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 마셔 알딸딸하게 취하면 노래 한가락이 이어지고, 또 노래가 이어지면 함께 술 마시는 사람들과 덩달아 춤이 이어지는 것이 음주가무의 진정한 의미. 이같은 기본적인 형태는 예나 지금이나 별다르게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술이 좋아, 사람이 좋아 찾게 되는 술집. 옛 고려시대 '주점'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우리나라 술집 변천사에 대해 알아본다.
◇주점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이는 당시 해동통보와 동국통보 등과 같은 화폐를 주조하여 이를 유통시키기 위해 술집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가요에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라"는 내용이 있어 당시 술 파는 주점들이 정착돼 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주막이 생겨나게 된다. 주막은 19세기 후반부터 여행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전국의 교통요지 곳곳에 생겼고 현주가, 소주가, 병주가, 주막, 목로주점, 내외술집 등 다양한 형태의 주점이 등장하게 된다. 그중 가장 흔했던 것은 목로에 안주를 늘어놓고 손님들이 원하는 안주를 굽거나 데쳐 내놓던 목로주점이다.
일제 강점기말 술집들은 더욱 다양화된다. 당시는 식량난으로 술이 귀했던 시절로 곡물로 빚던 술을 금해서 술 제조 자체가 철저한 통제를 받게 된다. 다행히 일제가 그나마 허락했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나라비'다. 일본어인 나라비는 우리나라 말로 '줄서기'라는 뜻으로 한잔 술을 마시기 위해 술집 앞에는 장사진을 치는 등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해방 뒤 본격적인 술집 등장
이때부터 서민층의 애환을 달래주는 포장마차가 등장하게 된다. 포장마차는 최근까지도 계속적인 인기와 명맥을 이어온 장수업종의 하나로 돈이 없는 서민층에게 인기가 많았다.
50~60년대 서울 청계천 등지에서 참새구이에 잔 소주를 팔던 포장마차는 70년대에 접어들며 요즘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불법 도로 점유물로 각 시군청의 단속 대상이 돼 일부 지역에만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60~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던 시절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음주 문화도 대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정부가 쌀이나 보리 등을 이용한 곡주를 만들 수 없게 규제했고 이때부터 희석식 소주가 대량 생산된다. 점차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서 각종 행사때마다 소주를 마시게 됐다.
70년대말에는 맥주가 폭발적으로 늘게 된다. 서구화된 맥주집은 물론 가정 소비도 늘어나게 된다. 또 요정정치의 대표격인 살롱과 스탠드바, 나이트클럽 등의 고급 서비스 업종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때 등장한 고급 술집이 있으니 바로 '룸살롱'이다. 고급 술집은 삼국시대로부터 권세가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담론을 해왔던 곳이지만 이처럼 특수계층만 이용했던 술집이 룸살롱이 등장하면서 대중들도 드나들게 된다.
80년대부터는 술집과 음향기계와의 결합, 술집과 노래의 결합, 성인쇼 술집의 확산 등 술집의 대 변화가 일어났다. 각종 퇴폐적인 성인 쇼가 범람했고 야간 통행금지의 해제로 심야영업을 하는 술집들이 확산됐다. 기업들의 접대문화가 확산되면서 보드카와 위스키 등의 소비량이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이 당시 술집 역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중의 하나가 카페라는 술집이 크게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또 디스코 춤의 열풍으로 디스코테크가 생기고 기성세대들의 만남의 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90년대들어 주류의 수입 개방으로 세계의 온갖 술들이 밀려오게 된다. 고급 위스키나 브랜디로부터 값싼 와인과 맥주에 이르기까지 술과 술집 종류가 다양해진다.
2000년대의 술집은 연령대별로 개성과 취향에 따라 더욱 세분화되고 있다. 인터넷 등을 통해 만나 같은 취미를 소유한 회원들끼리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술집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 분위기의 술집도 늘어나게 된다.
또 손님들의 관음증을 유발하는 섹시바와 트렌스젠더바와 같은 좀더 과감하고 색다른 술집들이 성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