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83년 개항을 출발선으로 인천은 전국의 어느 도시보다 숨가쁘게 달려왔다. 개항 이후 123년. 인천은 항만과 국제공항의 하드웨어에 송도·청라·영종경제자유구역과 도심 재개발사업으로 대표되는 소프트웨어를 본격 구동시키고 있다. 인천은 이제 동북아를 넘어 세계의 명품도시로 도약한다는 비전으로 꿈틀거린다. 오는 2009년 완공을 앞두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총연장 12.3㎞의 인천대교는 동북아와 세계로 뻗어나가는 인천의 용틀임을 상징한다. 지난 100여년 동안 인천의 지역경제는 그대로 한국경제였다. 인천경제는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면서 한국경제를 중심에서 이끌었다. 인천이 쉴새없이 뜀박질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인천인은 무엇을 먹고 달려 왔는가. 또 앞으로 누가 다가올 미래에 인천을 더욱 펄떡거리게 할 새로운 심장으로 부상할까. 경인일보는 창간 47주년을 맞아 개항 이후 인천을 이끌었던 원동력과 미래의 잠재 동력을 함께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1.미곡 집산지서 공업 중심지로
'오늘날 주식투자와 흡사했던 미두장'(개항기~1950년대)
 
 
  ▲ 미두취인소.(1895년에 일본인들이 지금의 중구 항동 5가에 설립한 미두취인소는 오늘날 증권거래의 효시로 불린다)  

1883년 개항한 인천항은 1905년 러일전쟁과 1930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급성장했다. 이 시기 인천항은 격동의 세계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셈이다. 인천은 일제 강점기 '전국 최대 미곡 집산지'란 수식어가 붙어다닐 정도로 미곡 수출지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인천항을 통해 미곡은 일본과 중국 전역으로 수출됐다. 미곡 수출이 늘어나면서 정미업도 번창했다.

 오늘날 증권시장처럼 미곡을 거래하는 미두장도 급속히 세를 넓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곡물 가격조절과 집화(集貨)를 위해 1895년 설립한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투기꾼들이 몰려들었다. 미두취인소는 오늘날 주식시장과 흡사했다.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이 가속화되며 인천은 일본의 병참기지로 변모했다. 동양방적과 현 대한제분·삼화제분을 비롯해 조선기계제작소, 일본도시바 인천공장 등 대규모 공장들이 여기저기 들어서며 인천은 공업중심 도시로의 변화를 맞는다. 특히 군수물자를 만들어내는 식품공업과 기계·금속공업 등의 성장이 두드러졌고 이것들은 근·현대까지도 인천산업의 밑거름이 됐다.

8·15 해방이 되고 미곡 수출은 끝났다. 일본이 쫓겨나며 그동안 세워진 공장들은 폐허로 변했다. 6·25전쟁은 1953년 휴전으로 일단 마무리됐고 초토화된 인천 앞엔 힘겹기만 한 50년대가 놓여졌다. 인천경제가 개항기 수산업과 농업 중심에서 상업중심으로, 다시 중공업도시로 산업구조가 변모하는데는 불과 70여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기상(71) 영진공사 회장

 
 
인천상륙작전 당시 함포사격으로 인천에 남아있는 산업시설은 거의 없었다. 인천항으로 미군의 군수물자와 원조 구호물자가 집중적으로 들어오던 시절이라 영어를 할 수 있는 이들은 인천항에서 검수업무 등의 일자리를 구하고, 의사소통이 안되면 단순 노무인력으로 일했다. 모두 인천항을 의지해 먹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역작업의 대부분은 이른바 '가대기'(등짐), '목도'(2인1조 또는 4인1조로 나무막대를 어깨에 걸머지고 짐을 옮기는 방식)라고 불리는 원시적인 작업형태가 주를 이뤘다. 기중기나 지게차도 있었지만 미군이 사용하다 고장나 매각한 게 전부였다. 당시 세신공사와 신일기업 등의 하역업체가 활발히 활동했는데 이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서울로 옮겨가거나 도산했다.

하역업체 대부분은 형제나 친구들끼리 동업한 형태였는데 이는 자본이 부족해서 빚어진 기업경영 방식이었다. 인천항은 지정학적으로 북한과 중국무역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는 만큼 발전잠재력이 풍부하다. 오래지 않아 남북교역이 활성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북한에 운송·소송·하역·보관 등 종합물류시스템을 전수하는데 인천이 많은 역할을 할 것이다. 시기상의 문제인 만큼 지금부터 착실히 준비해야 한다.

2.車산업 시동… 대기업 태동
'중화학공업과 재벌들의 산실'(1960~70년대)
 
 
  ▲ 현대제철(구 인천제철) 선재공장  
이 시기 인천의 지역경제는 고스란히 한국경제였다. 국내 자동차공업은 1962년 새나라자동차(주) 부평공장에서 첫 시동을 걸었다. 부평 새나라자동차 조립공장은 일본의 닛산(日産)자동차회사가 공급하는 SKD(Semi Knock Down) 방식의 부분품 조립방식에 따른 단순 조립품이었다. 당시 운행되는 승용차의 2대 중 1대는 새나라자동차였다.

1950년대 6·25 동란과 흉년으로 끼니를 채울 수 없었던 서민들은 대한제분과 삼화제분에서 생산된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먹으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했다. 동일방직과 경인직물 등에서 생산된 면사와 면포는 1960년대 정부의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에 따라 주력 수출상품으로 수출증대에 크게 기여했다.

인천은 이 시기에 국내 중화학공업의 본산이었다. 1964년 10월에 설립된 인천제철(현 현대제철(주))은 1970년 본격 가동된 포항제철에 자리를 넘겨주기까지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시설을 갖춘 철강 생산업체였다. 현대제철의 현재 국내 시장 점유율은 철근의 30.3%와 H형강의 81.2%, 스테인리스 21.8%, 주단강의 24.5% 등을 차지하며 인천제철의 명맥을 잇고 있다. 1959년에 설립된 동양제철화학은 소다회·염화칼슘 등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생산했다. 국내 유일 최대로 한국유리(현 한글라스)와 한국화약·한농을 빼놓을 수 없다.

이에 따르면 인천은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들이 탄생·성장할 수 있었던 든든한 모태이기도 했다. 삼성그룹(창업자·이병철) 한진그룹(〃·조중훈)과 한화그룹(〃·김종희) 대우그룹(〃·김우중) 동양제철화학(〃·이회림) 한라그룹(〃·정인영) 등은 인천의 젖을 먹고 자랐다.

# 정해영(72) 전 인천제철 노조위원장(중동구경영자협의회장)
 
 
인천 동구는 1960~70년대 인천제철(1964년)과 동국제강(1972년) 한국강관(1972년, 현 (주)신호스틸) 풍산(1968년) 부국철강공업(1972년) 등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본산이었다. 이 중 인천제철은 현대식 대한민국 철강공장의 시초이면서 국내 금속산업의 모태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인천제철에는 조업이 지장을 받을 만큼 전국의 중·고교 학생들이 단체견학을 오기도 했다. 상공부장관이 인천제철 가동현황을 둘러보기 위해 서울에서 수시로 내려올 만큼 인천제철에 대한 국가의 기대와 신망이 두터웠다. 인천제철은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을 추구하는 중추역할을 담당했다. 인천제철 기술진들은 1960년대 초반 포항제철 설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주춧돌을 놓았다. 1957년부터 1993년까지 지난 38년 동안 인천제철에서 근무하면서 한국 철강산업 발전에 일조한 철강맨(Iron man)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현재 동구에 자리잡은 대형 철강업체들은 수도권규제 등에 발목을 잡혔다. 이들 공장들은 설비 증설은 꿈도 못꾸고 중국 등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현대식 기계를 도입하려고 해도 못하는 형편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3.소비재 관련산업 크게 발달
'공단 조성으로 중소기업 전용 공업도시' 1980년대~1990년대

 
 
  ▲ 대성목재 전경  
1980년대 10년은 인천 경제의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이전 인천 경제가 중화학공업 중심이었다면 80년대에 들어서는 목재·가구와 악기·식품·전자 등 소비재 중심으로 재편된다.

또 대기업 중심에서 중소 제조업체로 주도권이 넘어간다. 여기에는 수도권정비기본계획(1984년)에 따른 대기업 활동 규제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주안·부평국가산업단지에 이어 국내 최대 규모의 중소기업 전용공단인 남동국가산업단지 조성(1987~1997년)도 구도재편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인천은 항만을 갖고 있어 원자재와 제품의 수입이 용이하고 배후에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넓은 소비시장이 있어 시민생활, 주거와 밀접히 연관된 소비재 관련 산업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1948년에 설립된 동화기업은 한국목재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집약·전문적 제재공업단지를 창설, 국내 목재산업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 인도네시아에 인니동화개발주식회사를 설립, 국내 목재업계가 해외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지난 2000년에는 국내 목재산업에서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성목재공업을 인수, 목재업계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이와 함께 보루네오가구와 바로크가구를 비롯 삼익악기·영창악기 등은 노동 집약산업으로 인천 서민들에게는 고마운 일자리이기도 했다. 이 시기 국내 대규모 목재·가구업체의 90% 이상은 인천에 몰려있었다.

삼성그룹의 모기업인 제일제당은 1979년 인천에 제2 공장을 준공하고 제일냉동식품을 설립하는 등 소비자의 다양하고 고급화된 욕구에 맞는 식품을 개발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참기름 등 '해표' 브랜드로 잘 알려진 신동방과 국내 최대 커피 생산업체인 동서식품도 80년대 중반을 전후해 사세를 확장했다.

#김현숙(72) 경신공업 대표이사
 
 
자동차와 자동차부품 산업은 국가 4대 핵심 전략산업인 동시에 인천시 집중육성 정책 산업이기도 하다. 자동차와 자동차부품 산업은 올해 상반기 인천지역 전체 수출액에서 40% 가량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다. 1974년 9월 창립된 경신공업은 현대자동차가 개발한 최초의 국산 자동차 포니에 납품하면서 자동차 배선사업을 시작했다. 현재는 인천·화성·군산·경주 등에 생산공장을 운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중국·인도 등에도 현지공장을 두고 있을 만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 2003년 수출1억불탑 수상에 이어 2005년 2억불탑, 2006년 3억불탑을 수상했다.

경신공업이 세계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성장 동력은 나날이 첨단화하는 자동차 생산기술에 발맞추기 위해 아낌없이 지원하는 연구개발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 1992년 기술연구소를 설립, 독자적인 자동차 와이어링 하네스(자동차의 전기배선을 세트화한 것) 설계능력을 확보했다. 특히 초기 50명에 불과했던 연구개발 인력은 올 1월 현재는 7배에 이르는 340명으로 늘렸다. 이들은 오로지 세계 최고의 자동차 배선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다. '인재가 곧 회사의 최고 재산이며 인재 육성만이 최고의 투자'라는 경영철학과 함께 노사화합이 가장 큰 자산이다.

4.글로벌중소제조업체에 미래달려
'새로운 도전' 2000년대~

 
 
  ▲ 모젬 생산 현장  
인천시는 지난 해 'BUY INCHEON'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 구상안은 송도·청라·영종경제자유구역과 동시에 추진되는 구도심재생사업, 도시철도 등 인천에서 진행되는 대형 개발사업의 밑그림을 담고 있다. 이에 따르면 경제자유구역 기반시설 등을 포함, 인천에서 추진되는 대형 개발사업비만 64조원, 여기에 민간개발 사업비까지 합치면 80조원을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인천시의 대규모 개발 청사진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제조업은 하락하고 날이 갈수록 전망은 어두워지고 있다. 실제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최근까지 한국유리를 비롯 대우종합기계, (주)휴스틸(옛 신호스틸), (주)한화, 동양제철화학, KT서부영업소, 대우일렉트로닉스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인천을 떠났거나 '탈(脫) 인천'을 준비 중이다.

이에 따라 도시의 경쟁력 평가의 기준인 GRDP(지역내총생산)는 2002년 4.9%를 기록한 이후 계속 하락하여 2005년에는 4.6%로 전국 16개 시·도 가운데 '만년 8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철강과 기계·목재 등 전형적인 제조업 도시로 성장해온 인천이 '성장없는 팽창의 늪'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인천산업단지포럼 이윤(47·시립인천전문대학 교수) 운영단장은 "인천은 국내 근·현대 공업화를 주도했던 전통 공업도시로서 지역경제의 중심은 IT와 BT·NT·물류가 아닌 전통 제조업이 기반"이라며 "GRDP액이 인천의 3배에 이르고 있는 울산이 철저히 제조업 중심으로 가고 있다는 점을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며 제조업 중심론을 강조했다.

인천상공회의소 이인석(64) 상근부회장은 "20세기 중반 세계 경제의 무대는 국가간 경쟁에서 도시간 경쟁으로 바뀌었다"며 "지역경제의 산물인 도시는 지역과 기업, 공장이 일체됐을 때 생동하는 도시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인석 부회장은 이어 "물류, 서비스, IT, BT 등 신성장산업도 중요하지만 주식회사 모젬이나 YG-1(대표·송호근, 세계적인 엔드밀 생산업체), 모아텍(대표·임종관, 세계적인 휴대전화 진동모터 생산업체)처럼 작지만 세계적인 기술력을 확보한 글로벌 중소 제조업체들의 성장을 도와야 인천의 미래가 있다"고 충고했다.

#김종완(42) 주식회사 모젬 대표이사
 
 
인천 남동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한 모젬은 휴대폰 윈도렌즈와 키패드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확보한 중소기업이다. 현재 휴대폰 단말기는 전세계적으로 노키아(35%)와 모토로라(21%)가 과점하고 있다. 모젬이 모토로라와 노키아에 수출하는 매출액은 전체의 98% 수준에 이른다. 모젬의 기술력은 인천을 넘어 국내보다는 세계에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셈이다. 지난 2001년 창업한 모젬은 처음부터 '글로벌 기업'을 목표로 세우고 기술 개발에 온 힘을 기울였다.

2003년 500만불 수출탑을 수상한데 이어, 2004년에는 4배 가량 신장된 2천만불 수출탑을 받았고, 2005년 5천만불, 2006년 1억불 수출탑 수상 등 4년 연속 수출탑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

모젬이 설립 7년만에 세계 유수의 기업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기술개발 노력만큼이나 고객만족 경영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객사의 요구에 맞는 철저한 품질관리, 납기일 준수는 고객사와의 신뢰관계 구축의 밑거름으로 모젬을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