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이식(54) 대한안마사협회 인천지부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시종일관 편안한 미소를 머금었지만 안마사들의 절박한 현실을 언급할 때만큼은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여주 출신의 임 회장은 약시로 태어났다. 지금은 아예 눈이 보이지 않지만 어린 시절에는 사물의 형체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며 유년시절을 보낸 임 회장은 15세 때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백남석 목사의 소개로 혜광학교의 전신인 '경기맹학교'에 입학한 것. 임 회장은 1978년 경기맹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국립 서울맹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26세 되던 해 꿈에 그리던 안마사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경기맹학교에서 맺은 인연으로 인천 도화동에서 동기와 함께 침술원을 운영했지만 결국 1년만에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집안 사정도 겹쳐 서울 월계동에서 수인역(옛 수인선의 인천 종점역) 앞 '새인천사우나'까지 매일 1시간30분거리를 통근했죠." 이리저리 뛰며 10여년을 열심히 일했다. 실력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의 벽은 여전히 크고 높았다.
임 회장이 안마사들의 권익확보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맘때부터다. 1980년대 초반 대한안마사협회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글 점자 '훈맹정음(訓盲正音)'을 반포(1926년)한 송암 박두성 선생에 대한 재조명 운동을 벌인 것도 기폭제가 됐다. 안마사들은 힘을 모았다. 다시 인천에 자리잡은 임 회장은 업무추진력을 인정받아 1986년부터 인천지부 간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임 회장은 1997년 1년간 인천지부 회장으로 일한 데 이어 2002년부터 다시 6년째 회장직을 맡고 있다. 임 회장의 임기를 거치며 인천지부는 소외된 이웃으로 눈을 돌렸다. 전국 15개 지부 중 최초로 '일요임상실'을 개설,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는 환자들을 안마와 침술요법(3호침 이하)으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료로 개방했죠. 하지만 아픈 사람들이 '미안하다'는 이유로 발길을 끊더군요. 어쩔 수 없이 명목상 치료비로 3천원정도를 받자 다시 환자들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안마사들을 양성하는 안마수련원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다.
"생각보다 중도 실명자들이 많습니다. 명문대 졸업반 학생, 공무원, 택시 기사 등등 출신도 다양하죠. 한때 좌절과 패배감에 젖어있던 이들은 안마수련원을 통해 다시 일어섭니다. 사람들은 별 것 아니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이들에게는 안마가 희망이자 인생의 전부죠." 임 회장은 안마사들의 생존권 보장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좌절을 딛고 일어선 시각장애인들의 눈물과 고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싸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세상이 야속하기만 하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장애를 무기로 데모를 일삼는 집단이라고 매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더욱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불법으로 얼룩진 안마업계를 바로 잡지 않는 한 정부는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