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황금만능주의가 넘쳐나면서 땀흘려 일하기 보다는 한방에 큰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경마·경륜·경정 등 사행성 게임은 큰 인기를 끌면서 서민들의 지갑을 노리고 있다. 지난해 '바다이야기' 등 인터넷 게임에 철퇴가 가해지면서 이들 사행성 게임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수·목요일에는 경정, 금·토요일에는 경륜, 일요일에는 경마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이 늘면서 가정과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도박 폐인'이 속출하고 있다.
경인일보에서는 지난 9월 둘째주부터 셋째주까지 2주간 1주일에 5일을 도박에 빠져 사는 이윤호(39·가명)씨를 밀착 취재했다. <편집자주>
재미삼아 손댔다 실패자 낙인… 경정 게임전 초긴장 줄담배… 허탈한 '꽝 꽝'… 다시 현금인출기로… 일렁이는 푸른물살위 분노의 욕설… 부푼 희망안고 이번엔 경륜장으로… 10만원 제한 아랑곳 않는 '통큰 베팅'… 오늘도 쓸쓸한 빈손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촉촉히 내리던 지난달 13일 오전 하남 미사리 조정경기장.
아직 경기 시작 전이었지만 3천여명의 사람들이 본부석 의자에 앉아 열심히 예상지 책을 주시하고 있었다. 볼펜으로 예상지에 줄을 긋고 공부하는 사람, 이면지에 적어가면서 책을 보는 사람, 서로 자기의 의견을 얘기하는 사람 등 마치 고3 교실을 보는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중에 유독 초조하게 강물을 응시하며 연거푸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씨를 만났다. 경기가 아직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이씨는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한 모습이었다.
이씨는 "오늘도 돈을 잃을까, 대박의 행운이 나에게 올 수 있을까 등 경기 시작전이 제일 복잡하고 떨린다"며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여기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남들이 비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비장한 각오로 이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이씨가 사행성게임을 시작한건 지난 2004년. 우연히 미사리 카페촌에 놀러 갔다가 경정장을 찾았다. 이씨는 처음 경정했던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처음에 그냥 재미삼아 돈을 걸었는데 적중해 5만원을 벌었어요.", "요즘같이 힘든 세상에 어디서 하루에 5만원을 벌겠어요. 그것도 아주 쉽게."
그러나 적중의 기쁨이 훗날, 이씨의 족쇄가 돼 인생의 실패자로 낙인 찍히게 만들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그날 이후, 다시한번 가면 큰돈을 벌 수 있을것 같은 착각이 머리 속에 계속 떠 오르더라구요." 그후 이씨는 지금까지 사행성게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기가 시작되자 이씨는 담배를 더 피우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예상지책을, 한 손에는 담배를, 이씨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 꽝이네, 저×× 훈련하고 나온거야." 경주가 끝나자 이씨의 입에서는 욕들이 거침없이 나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지막 경주를 남겨둔 시점, 이씨는 돈을 다 잃었다. 그는 현금인출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80만원을 가지고 왔는데, 다 잃었네요. 그만두고 싶지만 본전 생각이 나 멈출수 없습니다. 지금 찾는 돈이 대박으로 다시 돌아와야 할텐데…."
20만원을 찾은 이씨는 21.4배의 배당에 올인했다. 적중만 하면 420여만원이다. 이씨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역시 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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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가 끝난 후 큰 희망을 품고 입장한 이씨의 어깨를 늘어뜨린 모습과 싸늘한 날씨에 출렁이는 파란 물결이 묘한 대조를 이룬 하루였다.
지난달 21일 광명돔 경륜경기장.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이곳에서 이씨를 다시 만났다. 이씨가 먼저 반갑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아침부터 영구차를 보고 왔습니다. 왠지 대박의 행운이 나에게 올 것 같습니다." 이씨의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했다.
"오늘 돈을 따면 고향에 내려가고 그렇지 않으면 못내려 갑니다." 경륜장도 이씨처럼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로 스탠드는 북적거렸다.
경륜운영본부에서는 1인당 1차례 투표금액을 10만원으로 한정하고 있다. 도박성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차원에서 미리 정해둔 방침이다.
이에대해 이씨는 "일인당 한도는 정해져 있지만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운영본부측도 말로는 투표금액을 지키고 있다고 하지만 무인발매기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무한대로 구매권을 살 수 있다"고 운영본부측을 비난했다.
이씨는 "경륜운영본부를 탓하면 뭐하겠어요. 도박을 하는 내가 문제지…"라며 머리를 숙였다.
경륜은 특히 이곳 광명에서만 경주를 하는게 아니라, 교차경륜이라는 명목으로 부산경기 4경주를 대형 스크린을 통해 중계한다.
오후 7시40분 마지막 경주가 끝나자 이씨는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늘 20만원 정도 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잃은 돈을 생각하면 아쉬움만 가득하네요. 이돈으로 고향이나 가야겠네요."
경기가 끝나자 이씨처럼 경륜장을 찾았던 사람들은 '내일은 꼭 적중시켜 대박을 내겠다'는 꿈을 가지고 하나둘씩 뿔뿔이 흩어졌다. 이씨처럼 사행성 게임이 없으면 세상사는 낙(樂)이 없는 '대박을 쫓는 사람들'은 그렇게 멀어져가고 있었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