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이토록 충만한 기분으로 먹어 본 적이 없던 한 끼의 식사가 말을 하는 사이에 조금 시들해졌다. 처음 입에 넣던 쫄깃한 면발과 달콤하면서 고소한 맛과 독특한 향을 지닌 검은 소스가 분리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면을 쪼르르 입 속으로 말아 넣었다. 새콤한 노란 단무지 한 쪽을 입속에 넣고 나는 눈을 감았다.

향이 입속이나 콧속이 아니라 머릿속을 떠도는 느낌이었다. 두 번 다시 이런 냄새를 맡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어라 표현 할 수 없는 미묘한 냄새. 인생에 단 한 번만 허용되는 경험 같은 것.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감았던 눈을 뜨고 이면을 바라보았다. 문만 열면 방이 나타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미궁 같은 중국집, 향수를 뿌려 먹는 자장면, 혹시 저 사람 마술가는 아닐까?

점심 식사가 끝난 후, 강민기와 정신희는 전시일에 아는 기자를 대동해 오겠다고 약속하고 출판사로 돌아갔다. 이면은 그날 사용할 비품과 집기의 구입과 디자인을 살펴본다며 이형수와 함께 작업실을 나섰다. 나는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 남았고 전병헌은 내 작업을 도왔다. 8개 조각으로 복사한 지하철 노선표를 어떤 식으로 붙일 것인지 궁리했다. 노선표의 크기에 따라 사진의 크기를 결정 할 생각이었다. 사진은 다소 큰 사이즈를 전시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컴퓨터에서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사진부터 에이포 용지 사이즈의 사진을 뽑았다.

사진들을 코팅을 해서 압정으로 눌러 벽에 붙여볼까. 아니면 그냥 사진만 달랑 달아 놓을까. 일상적이고 흔한, 무심한 느낌을 주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프린트에서 천천히 밀려나오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미서는 개막일에 맞춰 오겠죠?"

나는 프린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전병헌에게 말했다. 전병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동의를 구하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쯤 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컷 피스'는 반응이 대단할거에요."

나는 막 끝 부분이 밀려 나오는 사진을 잡아채면서 중얼거렸다. 여행과 공연이 끝나면 미서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서는 늘 '글은 사는 만큼 나와. 치열하게 살면 치열하게, 열을 살면 열만큼. 더도 덜도 아니야. 딱 사는 만큼이야. 그러니 글을 쓰기 위해 산다거나 살기위해 글을 쓴다는 말은 다 틀렸어. 글이 사는 거고 사는 게 곧 글이 되는 거지'라고 말했다,

미서의 말대로라면 결혼 이후 글을 쓰지 못하는 상태는 곧 사는 게 아니었다는 결론이다. 미서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미서의 여행은 살기 위한 애처로운 몸짓이 아닌가. 속에서 뭔가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바람처럼 자유로이 해외여행을 한다고 미서를 마냥 부러워했다.

수니온 만에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서 있을 쓸쓸한 미서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기둥만 남은 포세이돈 신전 앞에서 미서는 무엇을 기원할까? 인생이라는 바다에 띄운 배가 무사히 항해 할 수 있도록 손바닥을 마주대고 있을까. 신은 무엇을 원할까? 미서는 무엇을 대가로 삶을 구할 것인가? 나라면 신 앞에 나의 무엇을 바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신 앞에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내 손에 들려있는 벌거벗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제공하고 삶을 얻는다. 죽어야 산다? 그런 의미인가. 죽은 다음에 삶이 무슨 소용인가. 말도 안 된다. 아니, 그게 맞는 말인지 모른다. 땅에 떨어져 썩어야 수확하는 씨앗처럼. 죽은 다음 부활하는 신이나 알을 낳고 죽어가는 연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