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고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 한때 고철탑으로 유명세를 탔던 김모(78) 노인은 그 속에서 혼자 빈 통들을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늦여름의 뙤약볕이 머리를 쪼갤듯이 쏟아졌던 지난 8월의 어느 날 오후였다.
수원시 권선구 구운동 김 노인의 집 앞을 기웃거리자 "담배나 한 대 피우자"며 노인이 손을 잡아 끌었다. 올봄 고철탑이 건재했을 때 보고 두번째였다. 코 끝으로 확 밀려드는 매콤한 땀 냄새. 오전에 주워온 고철을 정리하고 있었는지 때가 꼬질꼬질 낀 옷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지난 4월에 내가 헐었어. 고철은 다 팔았고. 생각했던 만큼 돈이 안되더라구. 아까워. 팔고 나니까 고철값이 팍 뛰었는데…. 이래서 사는 게 재미있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노인은 말을 이어갔다. "예전 구청장은 내가 쌓은 고철탑을 보더니 동네의 명물로 만들자고 했는데…. 여기 주위에 울타리도 구청에서 쳐 준거야."
수년간 힘들여 쌓았던 고철탑이 동네에서 '흉물' 취급을 당했던 게 가슴에 남았는지 노인의 말에는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몇해 전 TV 전파를 탄뒤 고철탑을 보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몰려들었지만 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고철탑이 민원의 대상이었다.
바람이 불면 쇳가루가 날리고, 비가 오면 녹물이 흐르고, 무너지면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게 주위의 우려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높이 안올리고 3층 정도 높이까지만 쌓을거야. 맨 위에는 고철로 비행기도 만들고 싶어. 사람들이 안 좋게 보니까 밖에서는 안보이게 안쪽으로 돌려서 탑을 쌓을 생각이야." 노인이 쌓은 고철탑을 본 적이 있기에 허황된 말로 들리지는 않았다. 노인의 솜씨라면 고철 비행기도 가능할 것 같았다.
연장들은 그래서 필요하다. 빈 캔은 납작하게 찌그러트려 포갠 뒤 철사로 단단히 묶어 쌓는다. 쇠파이프나 철근 등 긴 고철로는 뼈대처럼 탑의 구조를 만든다. 예전 탑 안쪽에는 사다리 같은 통로가 있어 12나 되는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기계로 쌓는 게 아니기에 당연히 사람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통로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놀라운 일이었다. 무거운 고철을 노인이 혼자 지고 좁은 통로를 따라 10 이상을 올라갔다는 얘기다. 물론 그런 과정이 하루에 한 두번이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차곡차곡 튼튼하게 쌓아올리는데는 나만의 기술이 있어. 아무나 쌓을 수는 없을걸. 난 노하우가 있으니까 가능한거야. 그런데 요새는 고철이 없어. 그래서 새 탑을 쌓는데 한참 걸릴거 같아."
노인은 이 땅을 24년째 월세 30만원에 임대하고 있다. 집이라고 해야 귀퉁이에 있는 3.3㎡ 정도되는 컨테이너가 전부. 전기와 수도, 도시가스 같은 건 당연히 없다. 살림살이는 냄비 몇 개에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달랑. 물은 하루에 생수통으로 한통씩 받아와서 먹고, 씻고 한다.
"이렇게 살아도 편해. 예전에는 다리 밑에서 산적도 있는데 뭐. 임대료를 낸다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안해주지만 난 폐지 줍고, 고철 주워서 먹고 살잖아. 나이 80 먹고 나처럼 이렇게 다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살림을 보고 놀라는 눈빛에 대한 노인의 답변은 간단했다. 또한 고철탑에 집착하는 이유 또한 간단했다.
지난 10일 새로운 고철탑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궁금해 다시 노인을 찾았지만 울타리는 철사로 묶여 있었다.
고철 모으기가 힘든지 새로 쌓는다는 고철탑은 여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고철을 줍기 위해 손수레를 끌고 수원 전역을 훑고 다니고 있을 터. 문득 예전에 들은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힘들지만 세상 사람들한테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