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성, 그의 연기는 관록과 함께 노련하다. 열이 있으며 정이 흐른다. 토월회로부터 오늘에 성장하였다. 힘과 열을 가진 젊은 배우이며 미남자이다."

   1939년 창립한 극단 '아랑(阿娘)' 팸플릿은 연기부 소속 배우 서일성(徐一星·1906?~1950?)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천 주안 출신으로 알려진 배우 서일성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배우'로 명성을 날렸던 황철(?~1961)에 비견할 만한 이로 평가받았다.

   원로 연극인 장민호(82) 선생은 "서일성이 활동하던 당시 황철에 버금가는 배우였다는 평을 자주 들었어요. 워낙 중량감있는 배우였죠"라고 말했다.

   연극인 고설봉은 생전에 서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청준좌'의 중심 스타가 황철이었다면 서일성은 '호화선'의 중심 스타였어. 뚱뚱하고 커다란 몸집이었지만 몸이 유연했고, 발성의 일인자였지. 별명이 '만능 모범꾼'이었어. 무대에 오르기 15분전 분장실에 나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약 5분간 얼굴을 뜯어보고 명상을 하다가, 5분만에 분장을 마치고 등장했어. 그런데 그게 30분 분장한 사람보다 훨씬 나았지."

   1937년 동양극장 연구생으로 입단해 연극을 시작한 고설봉은 이후 '청춘좌', '아랑' 등의 극단에서 서일성과 함께 생활했다.

   향토사 연구자 김양수(74)씨는 자신이 서울 예총 사무총장하던 시절 고설봉으로부터 서일성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기억했다. 고설봉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 선생 집이 인천이면 우리 서일성 선생님 잘 아시겠네요. 제가 그분 밑에서 연기를 배웠어요. 참, 어른 중의 어른이셨죠. 동양극장 일대를 연극의 거리로 만들고 이끈 분이 바로 서일성 선생님이셨어요. 비극장면을 연기할 때 서일성 선생은 무대 옆 밑에 보관해둔 숯덩어리를 이용해 즉석에서 분장을 했어요. 비탄의 얼굴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 고개를 숙이고 숯덩이를 이용해 얼굴 분장을 했어요. 그러고나서 조명이 탁 비치면 비극적인 얼굴이 나타났어요. 이걸 본 관객들은 순식간에 변한 모습에 감탄을 연발했죠."

   김양수씨는 "고설봉 선생은 평소 쾌활했는데, 서일성 선생 말만 나오면 자세를 바로잡았어요. 고 선생 이야기를 듣고 그 유명했던 서일성이 인천 출신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라고 전했다.

   이처럼 서일성은 1930년대 이후 조선 연극계를 말 그대로 '주름잡았던' 배우였지만, 그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고설봉, 김양수씨의 구술과 여러 기록들을 검토해 볼 때 서일성이 인천 출생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극작가 김영무씨는 저서 '동양극장의 연극인들'에서 "(서일성은)인천에서 1906년에 태어나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인천상업을 다녔는지는 불분명하다.

   인천고등학교측은 "학적부 자료를 검토한 결과 1920년대 인천상업 졸업생 가운데 서일성이란 이름은 나와있지 않다"고 답했다.

   서일성은 이후 인천 연극인들과의 '인연'을 계속 유지해간다.

▲ 1930년 첫번째 공연 단체사진
   김양수씨는 "서일성은 연기자 정암과 친구였고, 이들은 극작가인 진우촌과 함께 자주 어울렸다"고 말했다. 서일성이 이들과 함께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결성해 애관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몇몇 기록은 전하고 있다.

   또 무대미술가였던 원우전과는 '연극시장', '동양극장', '아랑', '백화' 등의 극단에서 함께 활동했다. 1940년 동양극장 연구생으로 연극을 시작한 원로 배우 황정순(82·여)씨도 서일성의 연기를 보면서 연기수업을 했다.

   서일성은 극작가 함세덕이 해방후 창립해 핵심멤버로 활동했던 '낙랑극회'에도 몸을 담았다.

   이들은 모두 인천이 낳은 연극인들이다.

   김영무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서일성이 1925년 토월회 신인 연기자 모집 당시 응모한 170여명 가운데 최종 선발된 7명에 포함됐고, 비대한 몸집(80㎏)을 지녔다'고 기록했다.

   당시 서일성의 나이는 10대 후반이었지만 이전부터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면서 '어깨너머로' 연극을 배웠다고 한다.

   흥행을 위해, '노래와 춤에 숙련한 배우'를 원했던 토월회 측은 유랑극단의 경험이 있고 호리호리한 서일성을 적임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일제시대 종합잡지 '삼천리'(1941년 3월)는 "서전(瑞典:스웨덴의 음역어)의 미남같은 황철군, 케리쿠파(Gary cooper)같이 키큰 서일성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서일성은 황철과 함께 당대 '꽃미남'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연극연출가 박진(朴珍·1905~1974)씨는 연극에세이 '세세연년'에서 1946년 3월 열린 '윤봉길 의사' 공연을 김구와 함께 관람했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께 첫날 참관을 청했다 …(중략)… 저 윤봉길역은 누구인가? (서일성이올시다) 그래, 그 사람 허우대가 좋군, 그렇지 윤봉길도 골격이 잘났지."

   육중한 몸집을 갖추고 발성이 좋았던 서일성은 관객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김양수씨는 "예전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에서 서일성이 공연할 때 일본의 유명한 연극평론가가 구경을 온 적이 있었어요. 이 평론가는 서일성을 보고 '동양 유일의 배우'라고 극찬했어요. 이렇게 무대를 꽉 차게 연기하는 이는 일본에도 없다고 하면서요"라고 고설봉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 1940년대 공연기념 사진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친일연극단체인 조선연극협회가 창설될 무렵인 1940년 김조성(金肇聲)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예원좌'에 서일성을 스카우트하면서 1만원의 돈을 지불했다.

   '예원좌'는 1935년 무성영화 변사 출신이었던 김조성, 임생원(林生員), 전세종(全世鍾) 등이 주축이 되어 활동한 단체였고 스케치, 난센스, 노래, 야담, 조선영화 해설극 등을 전문으로 했다.

   김조성은 '예원좌'를 1940년부터 창작극단으로 변모시키려 했고, 당대 큰 인기를 누리던 서일성이 필요했다.

   이 돈을 받은 서일성이 당시 2천400원을 주고 서울 청진동 수송공립보통학교 앞에 기와집 한 채를 구입했으니 1만원이란 돈이 어느 정도의 거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서일성은 조선연극협회 임원으로 활동했고, 1942년에는 조선연극협회가 주최한 '1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연기상을 수상했다.

   서일성은 이 때부터 '친일'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연극부문 자문위원인 명지대학교 이재명 교수는 "연극경연대회 1회 때는 친일 목적의식이 덜했고, 서일성씨가 맡았던 배역도 친일 색채가 덜했다"면서 "서일성씨는 친일활동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중한 쪽은 아니다"고 견해를 밝혔다.

   서일성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 고향인 인천에 내려와 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 때 지역경찰서 문화분과 명예위원(자문위원)을 맡았다.

   김양수씨는 서일성이 '정치색'이 약한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인천 유지들이 분야별로 자문위원을 맡았어요. 그 때 이 양반이 문화 쪽으로 간 것 같아요. 함세덕, 현덕 등 문화쪽 인물들이 모두 다 좌익운동을 하니까 자문위원을 문화 쪽에서 할 사람이 없었겠지요. 그런데 경찰 자문위원이래야 돈을 받아 먹었겠어요, 행세를 했겠어요?"

   서일성은 이 경력을 빌미로 전쟁 기간 인민군에게 총살당했다고 전해진다. 고설봉은 처가가 있는 충남 논산에서 숨졌다고 전했지만, 고향인 인천 주안에서 총살당했다는 말도 있다.

   서일성이 언제, 어디서 연기를 익히고, 배웠는지 알려진 건 없다. 하지만 그가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우리 연극계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인물인 건 분명하다.

   인천 연극 문화유산의 축적을 위해선, '희미한' 그의 행적을 하나씩 밝혀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명래기자·problema@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