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치아노 파바로티
▲ 마리아 칼라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1935.10.12~2007.9.6)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2.2 ~ 1977.9.16). 생애 최정상에서 유명세를 치렀던 이들이 요즘 새삼 다시 주목받고 있다.

파바로티는 지난 9월 6일 긴 암투병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고, 칼라스는 올해 서거 30주년을 맞아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오는 11월 9일까지 그녀를 기리는 예술제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신화가 된 성악가'라는 것 외에도 한가지 공통점이 더 있다. 바로 생전 숱한 스캔들을 뿌리며 남다른 '성편력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파바로티. '천상의 목소리'를 타고났다는 찬사처럼 육중한 체구에서 터져 나오는 탁월한 성량은 청중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파바로티의 말년은 음악적 성취와 무관한 사적인 문제로 얼룩졌다. 68세 나이에 35년 연하와 염문을 뿌리다 재혼해 화제를 모은 것. 34년간이나 동고동락했던 첫 아내 아두아와 별거에 들어가 막내딸보다도 어린 비서와 동거한 것이 평소 이탈리아식 가족주의를 자랑해왔던 파바로티의 이미지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 파바로티와 두번째 아내 만토바니 그리고 딸.
지금의 아내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결혼식을 치른 것은 2003년이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 만난 건 1994년으로, 당시 만토바니는 대학생이었다. 회갑을 코앞에 둔 파바로티는 만토바니를 개인 비서로 채용했고, 밀애는 갈수록 뜨거워졌다. 결과는 전처 아두아 베로니와의 이혼. 외도가 들통나면서 세 딸을 둔 이들 부부는 결혼 39년 만인 2000년 남남이 됐다. 파바로티와 만토바니는 2003년 1월에 딸을 얻었고, 그해 12월 정식 부부가 됐다.

현재 파바로티의 유산 3천만~2억유로를 놓고 유산다툼이 본격화됐다. 파바로티는 지난해 12월과 지난 6월, 7월에 각각 유언장을 작성했다고 한다. '제1 유언장'에 따르면, 유산의 50%는 네 명의 딸에게 고르게 배분하고 25%는 두 번째 부인인 만토바니에게주며, 나머지 25%는 유언 집행인으로 지정된 만토바니가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일에 쓰도록 하고 있다. 그 뒤 공개된 '제 2유언장'에는 2천100만 달러 규모의 미국내 자산들을 만토바니에게 신탁기금 형태로 넘긴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만토바니의 변호인들은 미국내 자산들이 그의 사망 당시 이미 신탁기금에 들어 있는 만큼, 법률적으로 '제1 유언장'이 적용되는 파바로티의 재산의 일부분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의 변호인들은 '제2 유언장'의 합법성과 더불어, 뉴욕에서 그 신탁기금이 만들어진 시점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또, 마지막 유언장은 미국에 있는 재산 전부를 만토바니가 쓸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여러모로 파바로티가 떠난 후, 진흙탕싸움으로 번지는 형상이다.

▲ 칼라스와 남편 메네기니
한편 마리아 칼라스는 오페라의 비극적 여주인공처럼 살다갔다. 1977년 파리의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칼라스의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자살'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세기의 프리마돈나이자 오페라의 여왕에게 심장병을 일으킬 만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을 준 것은 철저히 칼라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20세기 오페라의 아이콘이었다. 슬랩스틱 코미디와 마임 하면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고, 로큰롤의 제왕하면 엘비스 프레슬리를 꼽듯 20세기 오페라 디바의 대명사는 칼라스 였다. 그러나 절정의 칼라스를 끌어내린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였다.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본 칼라스에게 누군가 "그녀의 몸매가 오드리 헵번 같다면 진실된 비올레타가 될 것"이라고 말을 흘린 것이 화근이었다. 비올레타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백혈병으로 죽음을 맞는, 전형적인 나약한 여성이다. 칼라스는 1년 만에 30㎏ 이상의 체중을 감량했고, 어떤 오페라에도 어울릴 만한 호리호리한 몸매가 됐지만 미묘하게 목소리의 느낌이 달라진 것도 이때부터다. 하지만 어느 시대든 아름다운 외모는 해가 될 리 없었고, 일단은 '미모까지 갖춘 천상의 디바'로 절정에 이르게 됐다.

이제 칼라스는 부족한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후에 53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그녀가 갖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녀를 나락에 빠뜨린 결정적 요인이기도 했다. 바로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틀레 오나시스. 그녀는 베로나의 부호이자 오페라 광, 칼라스가 풋내기였을때부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남편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를 차버리고 오나시스와 열애에 빠져버린 것이다. 오나시스는 칼라스에 굉장히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메네기니에게 반공개적으로 "무슨 수를 쓰든 당신 아내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할 정도였다. 칼라스는 오페라에서 비운의 여인이 그러하듯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오나시스가 바라는 대로 오페라 출연을 자제해 1960년부터 62년까지 오페라 출연 횟수는 총 15회가 안 될 정도였다. 무대를 누벼야 빛나는 호탕한 디바는 사라지고 상류사회의 얌전한 부인이 된 것이다.

▲ 칼라스와 오나시스
그러나 오나시스는 칼라스를 배신하고 케네디의 미망인 '재키'와 결혼해 버렸다. 그러나 오나시스는 그런 다음에도 칼라스를 괴롭혔다고 한다. 끊임없이 칼라스에게 연락해서 "변함없이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호소했다. 칼라스가 모른체하자 집으로 찾아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만나달라고 요구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칼라스도 한없이 오나시스를 미워하면서도 막연히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오나시스가 입원한 병원에 문병을 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칼라스는 뒤늦게 무대와 노래를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흘러간 시간은 지친 몸을 남겼고, 목소리는 기백을 잃었으며 의욕조차 사라져 1965년의 런던 코벤트 가든의 '토스카' 공연을 마지막으로 은퇴해야 했다. 후에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메데아'에 출연하거나 음악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옛 동료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세계투어를 벌이기도 했지만 시든 뒤 되살아나지 않는 것이 꽃만은 아니었다. 절정이 사라진 칼라스의 곁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전율 섞인 목소리는 레코드 속에 갇혔다. 모두의 사랑을 듬뿍 받던 여인은 무대를 버리고 자신을 버리는 순간 오페라 속 비운의 여인,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