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는 국토의 25%가 해수면 아래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바닷물로부터의 생존은 국민 공통의 목표였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둑을 쌓는 것은 어떤 개인 가치와 이익보다 중요했다.

둑의 위치나 규모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하면서 수백년동안 '바다와의 전쟁'을 치르다보니 네덜란드인들은 하나의 문제를 접하고 그 결론을 내기까지의 과정에 익숙해지게 됐다.

이런 네덜란드인들의 습성은 오늘날 공공사업을 진행할때 시민들을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독특한 제도를 확립하게 됐다.

바로 KPD(Key Planning Decision) 제도다.

▲네덜란드 남부 고속철도(HSL-Zuid·High Speed Line-South)

최근 네덜란드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시작해 로테르담을 거쳐 벨기에, 파리까지 시속 300㎞로 운행하는 고속철도 건설이 한창이다.

이 '네덜란드 남부 고속철'은 오는 연말에 개통될 예정이다.

이미 암스테르담 스큅 홀 공항과 로테르담 항구를 기반으로 유럽의 물류·교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네덜란드.

남부 고속철 개통을 토대로 또 하나의 교통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복합 물류 국가로 발돋움한다는 복안이다.

▲갈등 발생

남부고속철도 건설 사업은 지난 1973년 계획됐다.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 확산된 환경주의 경향과 시민운동의 영향으로 중단됐다.

범유럽 철도를 구축하기 위한 시대적인 요구가 계속 이어지면서 1991년 재추진됐지만 소음 공해 및 토지 수용 문제 등으로 인해 반대 여론은 여전했다.

결국 네덜란드 정부는 1994년 KPD를 발표, 주민들의 참여를 적극 유도함으로써 그들의 의견이 고속철도 건설 계획에 반영되도록 했다.

▲KPD

주민들의 의견에 따라 당시 가장 큰 반대 요소였던 로테르담 남부 노선이 북부지역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일부 구간에서 기존의 철로를 이용하자"는 주민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고 네덜란드 내각은 처음 계획대로 '새로운 선로 건설' 방침을 고수, 서로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이후 ▲참여(26차례 정보 공유회의, 10차례 공청회) ▲조언(공간계획회의, 인프라 구축 자문단 회의, 여객운송 자문단 조언) ▲자문(주정부·지방정부 등 행정 파트너와 자문회의 개최) ▲부가 리서치(대학내 연구 용역) 등 KPD 절차에 따라 광범위한 의견 수렴 과정이 진행됐다.

▲최종 사업안 도출

마침내 97년 11월 상하원 승인을 받아 최종 노선이 정해졌다.

그리고 이 최종 노선은 또다시 상원 의회에 개진돼 6주간 의견을 수렴한 결과, 207건의 반대 의견을 접수, 이 가운데 22건을 반영해 최종 사업안을 작성했다.

또 정부는 이들 의견을 분석·정리해 수정 노선이 통과하는 지자체, 시민들과 참여과정을 거쳐 노선의 상세설계를 수정·보완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0년 4월 드디어 착공, 7년만인 올해 10월 완공했다.

그러나 아직 정상운행은 하지 않고 있다. 벨기에, 프랑스 등 남부 고속철이 경유하는 인접 국가의 철도 시스템과 연결과정에 안정성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남부 고속철도사 베이저링 프레드(Beijerling Fred) 홍보담당은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자연경관을 망치지 않고 살리는게 중요했다"면서 "너무 많은 의견을 너무 오랜기간 수렴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고속철도를 건설하지 않는 것보단 주민 의견을 반영해 건설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KPD의 성과

가장 큰 성과는 암스테르담 남부 지역의 '흐룬하트(Groene Hart)' 지역 노선을 지하터널 노선으로 변경한 것이다.

이 지역 농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고속철도 건설을 위해 팔아야 했기에 당초 계획에 반대했다.

특히 환경단체는 고속철이 흐룬하트를 통과할 경우 생태적·경관적 가치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킬 것이라며 반발했다.

결국 정부는 반대의견을 받아들여 무려 10㎞에 이르는 흐룬하트 구간을 지하터널로 변경했다.

프레드 홍보 담당은 "지하 터널로 노선이 변경되면서 각종 브릿지와 터널, 콘크리트 구조물 등 다양한 추가 구조물 및 안전 검사들이 필요했고 결국 이 지역 공사비는 3배 이상, 전체 공사비로는 20% 이상 증가했다"면서 "공사기간도 16년 가까이 소요됐지만 네덜란드는 시민참여를 통해 건설된 남부고속철도사업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