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조봉암'을 '죽산 조봉암'으로 이끈 사건은 1919년 3·1만세운동이었다.
당시 조봉암은 고향 강화에서 만세운동에 가담, 일본경찰에 체포돼 1년형을 언도받았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의 징역형을 마치고 고향 강화에 돌아온 조봉암은 나라가 무엇이고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조봉암은 1957년 '희망' 2·3·5월호에 실은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이러한 자전적 고백과 함께 중요한 인물 한 명을 길게 소개한다. 강화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봉진(劉鳳鎭). 조봉암의 사상형성기에 유봉진은 조봉암이 자신을 '애기패'라 규정할 정도로 감히 넘보기 힘든 인물로 그려진다.
'내가 걸어온 길'에 유봉진은 이렇게 소개됐다.
'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달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런데 유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천 명이 태형(볼기맞는 형벌)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었다. 유선생은 마리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었어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했다. 유선생은 오년 징역살이를 했고 우리 애기패들은 일 년 살았다.'
글에서 보듯 개화의 상징인 강화에서, 전국 3·1운동사에서 유봉진이 남긴 발자취는 대단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안타깝게도 3·1운동 재판기록 외에 더 많은 행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유일한 혈육인 아들 제중(濟衆·1945년생)씨를 만났지만 그 역시 해방되던 해 태어나 3·1운동 기간에 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한 기억을 쏟아놓지 못했다. 다만 아버지가 작성했다는 이력서를 소장하고 있어 거사를 치르게 된 동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유봉진은 강화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징역살이를 했는데 조봉암은 5년으로 기억했지만 유봉진은 이력서에서 1년9개월을 복역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일을 "대한독립대학교에 입학해 1년9개월에 졸업했다"고 썼다. 옥살이를 독립운동을 배우는 학교생활을 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일로 강화군대는 없어지는데 유봉진이 강화 3·1운동을 주도했던 나이가 34살이니 십수년 전에 이미 일제항거 전력이 다분했음을 읽을 수 있다.
뒤이어 나오는 '우리 대한국은 반만년에 역사국으로서 악마 일본에게 불행이도…중략…일본대사 이등박문으로 대한정권을 농락하고 압박하든 일이며 명성황후께서 토유 이등이놈에게 해당하옵신 일을 일일이 대중에게 열열히 설명하야…중략…그날 그때부터 지금까지 천부님전에 대한독립을 애걸복걸 하옵드니…'라는 표현을 볼 때 나라를 잃은 슬픔이 커 항일의식으로 연결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봉진은 은세공업자로 알려져 있지만 교육에도 남달랐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그 스스로 교육관련 이력을 상세히 적고 있기 때문이다. 19살 때 부천군 북도면 장봉리 장흥학교에 교사로 1년간 근무했고, 20살 때부터 상업에 종사했다. 31살 때는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월오학교 부교장으로 일했다.
징역살이를 하고 난 뒤인 36살 땐 부천군(강화) 북도면 시도리에 사립 신창학교 설립자 겸 교장으로 근무했다. 40살 때엔 강화군 하도면 내리에 있는 폐교된 사립 노산학원을 개교해 스스로 2년간 근무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한의사 자격증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들 제중은 "집안에 은을 다는 저울과 망치는 보았는데 은세공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강화 합일국민학교에 다닐 때 부친 심부름으로 한약재를 사러간 기억이 있다. 무허가 한의사인 줄 알았는데 한의사 자격증도 있었다"고 말했다. 아들 제중은 자신의 이름이 제중(濟衆:대중을 구제하는 인물이 되라는 뜻)인 것도 한의사인 아버지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강화와 서울에서 잇따라 운영한 한의원 이름도 '제중한의원'이었단다.
치솟는 물가를 바로잡기 위한 방안을 건의하고 독립건국을 위해 건국비를 각 도·부·군에 지시, 징수하자고 했다. 특히 해산된 강화군대를 회복시키고 각 도·부·군에 경찰협조기관 경호단을 조직할 것을 권했다.
또 중학교가 없는 각 도·부·군에 중학교를 설치해 청소년 양성에 지장이 없도록 하자고 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다 보니 자식은 늦게 봤다. 독자(獨子) 제중씨가 1945년 태생이니 유봉진이 60세 되던 해에 아들을 얻은 것이다. 아들 제중씨에 따르면 자식을 갖기 위해 강화 마니산에서 100일 기도 끝에 자식을 잉태했다고 한다.
부친보다 어머니가 3살 연상임을 감안하면 당시 마을의 경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제중씨는 이 부분에 대해선 확실한 언급을 피했다. 유봉진의 유품은 잦은 이사과정에서 거의 다 분실돼 지금 남은 것이라곤 사진 1장과 자료 몇 가지가 고작이다.
<지홍구기자·gigu@kyeongin.com>지홍구기자·gigu@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