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애국지사의 아들 제중(62)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3남 1녀의 자녀를 올곧게 키운 뒤 경기도 남양주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가난 때문에 어떤 때는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원망했던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서울로 이사올 때 생활이 굉장히 어려웠다. 3·1운동을 할 때는 아버님이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집은 제법 살았던 것 같은데 독립운동하면서 다 탕진한 탓인지 사는 게 매우 힘들었다"고 소회했다.
부친 작고 후 제중씨는 17세까지 어머니 행상 덕에 살았고, 1963년부터 자동차 운전을 배워 자녀들을 키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주변에서 '아버지가 고위층과 많이 친했으니 찾아가 보라'고 했다. 하도 어렵고 해서 (서울)효자동 모 국회의원 집을 찾아갔는데 반응이 냉담했다.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절대 찾아가지 않았고 나 혼자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며 힘겨웠던 과거를 털어놓기도 했다.
유봉진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아들 제중씨 때문이었다. 자식을 늦게 본 탓에 자식을 제대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제중씨는 "아버지가 저를 목사로 만들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왔다"고 말했다. 강화 합일국민학교 3학년까지 다니고 서울로 전학했다.
이화여대 입구로 이사를 했는데 전세방을 얻어 살았다. 제중씨는 전세금도 아버지가 남의 돈을 빌려 마련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유봉진은 서울에 온 지 2년 만에 세상을 떴다. 어린 나이였지만 제중씨 기억엔 아버지가 남을 위해 산 봉사자로 남아 있다.
서울에 올라와 '제중한의원'을 운영하면서도 "돈없는 사람은 무조건 무료로 치료를 해줬다"고 했다.
특히 왕진을 많이 했는데 아픈 사람이 의원에 오는 것을 바라기보다 직접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고도 했다. "강화에 있을 때도 거지를 보면 집으로 데려와 겸상을 하고 보냈다"고 덧붙였다.
늦둥이 탓에 부친에 대한 기억은 짧지만 "어릴 적에도 국기를 집에 걸어 놓을 정도로 애국심이 높았다고 들었다. 34살에 거사를 했는데 아마 역동적으로 하셨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지홍구기자·gigu@kyeongin.com>지홍구기자·gigu@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