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합은 인천에서 경인지역 언론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신문(현 경인일보)을 창간했다. 그런데도 현재 인천에 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지역 원로 언론인들만이 기억할 뿐이다. 지난 2003년 그가 숨졌을 때도 그의 빈소는 인천이 아닌 막내 아들(허종)이 담임목사로 있던 대전 빈들교회에 마련됐다. 지역 신문사들은 대부분 영정사진 한 장 구하지 못한 채 그의 부고기사를 내보냈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수재의연금 횡령 사건 때, 지역 사회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상당수 당시 언론인들이 그를 '죄인' 취급했던 것이다. 권력과의 대립에 의한 '표적 수사' 결과물이란 게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결국 허합은 억울함을 벗고 무혐의로 풀려난다. 그뒤 허합은 지역 언론은 물론 인천과도 인연을 끊었다고 한다.

   허합은 1917년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확실히 전해지지 않는다. 출신 학교에 대해서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천 화양초등학교 졸업 후 경기도에 올라와 중·고교를 마쳤다는 말도 있고, 초·중·고교를 모두 서천에서 다녔다는 얘기도 있다. 친척인 허숙(73·전 인천신문 기자)씨는 허합이 인천에 와서 한염해운에 입사한 뒤 1957년 쯤 퇴직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이후 허합은 1959년 '주간인천'을 인수했다. 주간인천에는 '향토 언론계의 거목'이라 일컫는 김응태(당시 편집인)가 있었다. 허합은 김응태를 주간인천의 편집국장에 임명한다.

▲ 인천신문 사옥 앞에서 편집국 전 직원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아랫줄 가운데 안경을 쓴 사람이 허합. 왼쪽은 고 황준수(황호수 전 인천일보 사장 형)씨, 오른쪽은 오광철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
   허합은 중구 사동 창고건물에 편집국과 업무국을 만들고, 1960년 8월15일 인천신문 첫 호(현 경인일보 지령 1호)를 발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인천신문 기자를 지낸 오광철(73)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은 "경인일보가 언론 통폐합 날짜인 9월1일을 창간 기념일로 잡고 있는데, 사실은 첫 신문을 찍은 8월15일로 당겨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인천신문이 문을 연 1960년 대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군사정권의 힘에 눌려 인쇄시설을 갖추지 못한 신문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아야 했다. 군사정권은 1962년 다시 칼을 빼들었다. 기준에 미달하는 신문사 문을 닫게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정부가 내건 기준은 윤전기. 당시 대부분 신문사가 윤전기가 아닌 인쇄기로 신문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인천신문은 흔들리지 않았다. 허합은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말리노니'라는 일제 윤전기를 사왔다. 그리고 이 윤전기로 2개 면 신문을 발행했다.

   이후 허합은 말라노니보다 성능이 좋은 대만제 윤전기를 도입해 신문을 만들었다. 허합은 직원들에게 늘 '근검절약'을 강조했다.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선 버릇처럼 "10원을 아껴야 10원을 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당시 중구 중앙동 중앙감리교회(현재 송도동으로 이전)에서 오랜기간 장로로 활동했다.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한번 술을 입에 댄 적이 있단다. 문선공(활자를 뽑는 사람)들이 임금문제로 신문제작을 거부할 때였다. 사태를 지켜보던 편집국에서 경제부 한 기자가 술을 마시다, 'Tis(This) I'll be here in sunshine or in shadow(양지바른 곳이든 그늘 속이든 난 이곳에 있을 거예요)'란 노래 '대니보이'(Danny boy)의 한구절을 불렀다.

   허합은 곧바로 편집국에 뛰어가 "신문사가 어려워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누가 노래를 불렀느냐. 애사심을 가진 기자가 대체 누구냐"며 직원들과 어울려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잘 살기 위해서는 인재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 허합의 생각이었다. 허합은 '학생이 나라의 기둥'이라고 강조했다. 허합은 지역 신문 중 처음으로 학생백일장을 열었다. 중·고등학생 대상 음악콩쿠르와 무용콩쿠르도 개최했다. 비인기 운동경기 활성화를 위해 신문사 주최로 핸드볼대회도 열었다.

   당시 전국 대부분 신문사는 2개 면 신문을 발간했다. 인천신문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신문은 1면에는 정치·경제, 2면에는 사회 소식을 각각 실었다.

   군사정권은 신문을 수시로 검열했다. 반정부 성향 기사는 신문에서 볼 수 없는 시절이었다. 인천신문도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인천신문이 택한 것은 차별화였다. 타 신문과의 차별을 위해 잘못을 꾸짖는 강한 논조의 기사를 사회면에 실었다고 한다.

   허숙씨는 "경기도청이 학생 기성회비 100% 인상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인천신문이 이를 보도하면서 교육정책 잘못을 지적했다"면서 "경기도지사가 며칠 뒤 이 정책을 철회했다"고 말했다.

   그런 인천신문의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5·16 군사혁명 이후 박정희 대통령 수하 군인들은 전국 각지 요직을 차지했다. 인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합은 특히 유승원 전 국회의원과 사이가 좋지 못한 것으로 지역 언론인들은 기억한다.

   한 원로 언론인은 "허합은 김정렬 전 인천시장과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데 유 전 의원과 김 전 시장은 서로 라이벌 관계였다"고 말했다.

   인천신문은 이유없이 거래처를 하나 둘씩 잃기 시작했다. 인쇄를 맡기던 업체들이 인천신문과의 거래에 난색을 보였다. 유승원씨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란 게 일반적 시각이다. 경영이 어려워졌다. 인천신문은 직원들 봉급조차 주기 어려운 형편이 됐다. 경찰이 신문사 주위를 맴돈 것은 이맘 때 쯤이었다. 사복 경찰이 직원을 만나 허합의 행적을 캐고 다녔다. 일부 기자에겐 무엇인가 적힌 종이를 보이며 "허합의 범죄사실이 담긴 조사서류"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허합은 1969년 1월 사법 당국에 붙들려 갔다. 그에겐 횡령 혐의가 적용됐다. 수재의연금 중 일부를 횡령했다는 것이었다. 사법 당국이 발표한 허합의 횡령액은 당시 돈으로 5천20원. 인천신문 총무국장을 지낸 임상규(73) 전 경인일보 사장은 "쌀 한되 값도 되지 않는 돈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며칠 후 허합은 재판부로부터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사법 당국은 9년 동안 수재의연금 모금을 하면서 찢어진 지폐와 낡아서 못쓰는 돈을 왜 처리하지 않고 가지고 있느냐며 허합에게 횡령 혐의를 적용했어요. 그런데 담당 판사가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것이지요. 당시 정권은 허합을 구속하려는 것보다 신문사 사장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이런 방법을 택한 것 같습니다." 임상규 전 사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허합은 풀려났으나 더 이상 인천신문 사장이 아니었다.

   인천신문도 제 갈길을 가지 못했다. 지역 사회는 허합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장에 앉히려고 했다고 오광철 전 편집국장은 밝혔다.

   결국 인천신문은 인천에서 수원으로 본사를 옮긴다.

   허합은 몇 해를 인천에 남아 꽃집을 운영하며 교회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다 1975년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아내와 4남3녀 모두가 미국과 일본, 프랑스로 떠났다.

   허종 목사도 대전 빈들교회에서 극빈층과 외국인 노동자 등을 위해 봉사활동을 벌이다 목회활동을 위해 작년 프랑스 몽벨리에로 떠났다.

   허합은 미국 LA의 큰 아들(허강) 집에 살면서 캘리포니아주 운전면허증 시험에 응시·합격하는 등 삶에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허숙씨는 "80년 대 미국에 갔을 때 나를 차에 태우고 LA 시내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허숙씨가 90년 대 다시 미국을 찾았을 때 허합은 치매를 앓고 있었다. 허합은 10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다 2003년 12월 27일 향년 86세 나이로 미국에서 숨졌다.

<김장훈기자·cooldud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