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를 형성하고 대부분의 정치 형태는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주권을 가진 국민들에 의해서 나라가 운영되는 것이 기본 이념이다. 그러나 다양한 국민 개개인의 권리는 충돌될 수 있기 때문에 법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것이 법치국가이다. 법치국가에서 법은 생명과도 같은 것으로 법집행의 정당성이 확보되려면 법의 내용이 만인에게 공감을 얻도록 공정해야 한다. 또한 그 법에 대한 제정과 법을 통해 보장된 권력 역시 어느 정도는 분리되어 있어야 부패의 가능성이 적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민주주의 국가의 형태는 전래되어 오던 것인가? 권력의 분립과 법치의 생각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인가? 법치의 전통과 권력의 분립에 대한 이해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체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정신에 대한 원론을 이해하려면 그 이론의 근저를 제공했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숙독할 필요가 있다. 당대는 물론 고대와 유럽각국,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제국을 포함한 전 세계적인 범위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풍부한 실례를 바탕으로 비교 분석하여 철저하게 경험주의 방법으로 저술된 이 책에서 그는 '법은 인간의 이성이며 법의 정신은 인간의 이성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서 정치적 자유란 결코 무제한의 자유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법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에서 자유란 단지 그가 원하는 바를 행할 수 있고 또한 그가 원하지 않는 바를 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역설하였다. 바로 몽테스키외가 설정한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권리'였던 것이다. 아울러 모든 국가에는 세 종류의 권력이 있는데 입법권, 만민의 법에 관한 사항을 집행하는 권력 및 시민법에 관한 사항을 집행하는 권력이 그것이다. 입법권과 집행권이 한 사람이나 또는 한 무리의 지사들의 수중에 집중된다면,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재판권이 입법권과 결합된다면 시민의 생명과 자유는 자의적 권력에 노출될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나 또는 군주, 귀족 혹은 인민과 같은 한 무리가 이 세 가지의 권력, 즉 법을 만드는 권력, 공공의 의결을 집행하는 권력 및 각 개개인의 범죄와 불화를 재판하는 권력을 행사한다면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여겼다. 삼권 분립의 이론적 기초는 바로 여기에서 완성을 보았다.
한 쪽으로 집중된다면 그만큼 효율적인 집행을 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해서 몽테스키외가 굳이 이렇게 분리시켜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권력의 속성상 집중된 권력은 견제하는 세력이 없기 때문에 부패할 가능성이 높고, 법의 집행도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실행될 여지가 권력이 분립되어 있는 경우보다 많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형식적으로는 권력을 분립시켜 놓았으나 독재 권력에 의해 정부가 운영되는 일부 나라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세력들을 정당하지 않은 법 절차를 통해 강요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 철저한 삼권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아 특히 사법부의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한 역사가 있다. 권력의 분립은 효율적인 통치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법을 통한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더욱 강력한 집행력을 갖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법과 도덕의 관계
이웃집 닭을 훔친 아버지를 신고한 아들에 대해서 준법정신이 투철한 시민이라고 상을 주어야 할까? 아니면 아버지의 허물을 알려 공명심을 이루려는 패륜아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법에 의한 통치인 법치 국가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나라의 운영 측면에서는 준법이 중요하겠으나 인륜의 도덕이라는 관습적이고 중요한 사회적 묵계를 저버리는 것은 법 이전의 도덕의 문제로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국법을 어겼다면 왕의 자리를 내려놓고 아버지를 업고 산으로 달아났을 것이라는 순임금에 대한 맹자의 믿음은 동양에서 법과 도덕의 경계를 선명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는 연행하기만 하면 될 장발장을 눈앞에 두고 갈등하는 형사 자베르의 고민을 보여준다. 법과 도덕의 경계에서 또는 법과 양심의 경계에서 순임금은 법의 가치를 넘어 인륜을 지켰고, 자베르는 양심의 무거운 소리에 형사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법을 집행해야하는 처지에 있는 경찰관이 자신의 양심 때문에 고민하다는 것은 법이 반드시 모든 양심의 실현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법이 융통성을 가진다면 오히려 그 공정성에 흠이 생기고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가치관은 그 가능성을 더욱 확대시켜 놓고 있다. 그러나 자베르의 고민 역시 지극히 인간의 도리에 진실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법과 도덕의 경계는 충분히 고민해 볼 가치가 있는 문제일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를 형벌로서 하는 것과 덕과 예로서 하는 것의 차이를 이렇게 말하였다. "정치로써 다스리고 형벌로써 질서를 잡는다면 백성들은 형벌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은 없어질 것이다. 덕으로써 다스리고 예로써 질서를 잡는다면 부끄러움도 알고 선에 이르게 될 것이다." 형벌의 집행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통치의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덕을 권면하고 예를 가르치면 형벌을 통해 얻으려고 했던 법질서의 준수와 준법의식을 더 높은 차원에서 겸비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형벌을 정해놓은 법은 만능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각성에 도달할 수 있다. 다원화된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은 법을 통한 문제해결을 강조한다. 그것은 위력을 통한 해결보다는 분명 높은 수준이지만 인간의 자율 도덕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는 방식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베르의 고민은 우리 자신에게도 되물어질 수 있는 질문이다.
3. 법과 양심의 경계 -재판관의 경우
얼마 전 새삼 화제가 되었던 '인혁당 사건'에는 불의의 시대에 만들어진 법으로 인하여 무고하게 삶을 마친 사람들의 억울함이 배어 있다. 당시 인혁당 사건을 비롯하여 불의한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았던 유신체제에서 법의 집행을 맡고 있던 판사들은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일부는 법복을 벗고 나오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런데 당시 현행법에 따라 유죄판결을 했던 일부 판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실정법을 집행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시민사회에서는 판사들에게 재판의 독립권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기대한다. 유신 당시 불의한 법에 의해 유죄판결을 내린 그들은 법에 충실했으나 양심에 충실했는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인권변호사로 이름 높은 박원순 변호사가 엮은 「매 목은 매우 짦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는 법을 수호해야 하는 재판관이 법을 지키며 또한 양심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법'만 보고 '양심'을 보지 못한 재판관들을 올바른 재판관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 좀 더 진전하여 불의한 법에 순종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준법정신일까? 아니면 투쟁하는 것이 올바른 법의 제정과 집행에 기여하는 것일까? 법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법질서에 순종할 때에 나라의 질서가 지켜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적 질서란 때로 '국가보안법' 등의 일부 조항에서 볼 수 있듯이 억압의 기제로 작용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 법적 질서가 과연 지켜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검토는 그 사회의 법적 수준을 고양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불의한 법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건강한 사회의 법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악법에 대한 묵수는 준법의 탈을 쓴 불의한 행동이며, 잘못된 제도를 항구화할 수 있는 것으로, 불의한 체제에 대한 부응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법의 제정 단계에서 이 문제는 검토되어 수정되어야 하지만 법의 운용단계에서도 지속적인 비판적 시선이 필요하다는 관점을 가진 이들은 법이 우리 인간 정신의 실현에 최상위의 가치가 아니라 양심과 도덕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견해는 인간의 도덕성과 가치실현에 대한 기대가 높은 것이다.
(실전연습) 법은 사회의 초소한의 규칙이지만 한 번 정해진 법은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인 가치를 구속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음의 제시문을 바탕으로 법과 도덕, 양심의 바른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라.
(가) 부당하게 신을 모독하고 아테네의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는, 국외 탈출을 권유받았으나 비록 악법이라 해도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기꺼이 독약을 마셨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1986년도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에 실린 글이다. 1987년도 중학교 도덕에서도 비슷한 글이 실려 있다. '법이나 규칙 중에는 불합리한 것이 있는데 그래도 법은 법이기 때문에 정당한 절차를 거쳐 고치지 않는 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전두환 정권 아래서 악법 거부투쟁과 재판거부 투쟁을 벌였던 민주화 운동가 장기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악법은 마땅히 거부하고 이에 맞서 싸워야 하는데도 법률은 지켜야 한다는 준법정신이 국민 일반에게 광범위하게 주입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맹목적인 준법정신을 이용하면서 군사 독재 정권은 법률에 의한 불법 폭력 통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악법도 법'이라는 그릇된 법사상에서 해방되어 악법에는 맞서 싸워야 하며 악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민주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나) 이제 방금 자기가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그는 몸서리쳤다. 명색이 자베르라는 이름의 그가 경찰의 모든 법규와 모든 사회적 및 법률적인 조직과 법률 조항을 완전히 어기고, 한 죄인을 자신의 의사에 따라 석방해 버린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남은 해결책은 단 한 가지, 급히 롬 아르메 거리로 되돌아가서 장발장을 체포하는 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그의 길을 서서 방해했다.
그의 가장 큰 괴로움은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된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뿌리째 뽑혀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의존해 왔던 법전도 이제 산산조각 난 파편이 되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단 하나의 척도였던 법률적인 확신과는 전혀 다른 감정적인 계시가 마음속에 끓어올랐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 훤히 그의 영혼에 보였다. 즉 그가 받은 자비를 갚아야 한다는 것. 헌신·연민·관용·동정이 미치는 격렬한 힘에는 위엄조차도 무너져 버린다는 것, 인간을 존중하는 것, 격정적으로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인간의 정의와는 반대로 나아가는 신의 정의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미지의 도덕이라는 무서운 해돋이를 보았다. 그 해돋이가 무서워져서 눈이 아찔했다. 억지로 독수리의 눈을 갖게 된 올빼미처럼.
(다) 어저께까지 옳았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리 보아도 틀림없이 옳던 것이 하루아침에 정반대인 극악으로 변하는 법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비위에 맞으면 옳고, 비위에 거슬리면 그르단 말이냐?
가난한 자, 괴로워하는 자를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의일진대 선천적으로 결정된 운명밧줄에 묶여서 라틴말을 배우지 못한 그들이 쉬운 자기 말로 복음의 혜택을 받는 것이 어째서 사형을 받아야만 하는 극악무도한 짓이란 말이냐?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분신이니 신성하다지마는 아무리 보아도 빵이요, 먹어도 빵이요 포도주 역시 다를 것이 없다. 말짱한 정신으로는 거짓이 아니고서야 어찌 인정할 도리가 있을 것이냐? 무슨 까닭에 벽을 문이라고 내미는 것이냐? 절대적으로 보면 같은 수평선상에 있는 사람이 제멋대로 꾸며 낸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이냐? 바비도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위로 로마 교황부터 아래는 사제에 이르기까지 거창한 조직체가 자기를 억누르고 목을 졸라매는 위압을 느꼈다. 전체 로마 교화와 일개 재봉직과는 너무 어처구니없는 대조였다. 선택의 자유는 있을 수 없었다. 죽음이냐 굴복이냐 두 갈래길 밖에는 없었다. 죽음 소름이 끼친다. 들불에 비친 손을 어루만지고 다시 얼굴을 만져 보았다. 이 손 이 얼굴이 타서 재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내 자체가 없어진다. 아무것도 없이 생각이라는 것도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