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에 이어 1막이 올랐다. 서곡부터 긴장감이 감돈다. 비극적 오페라임을 미리 암시해 주는 것일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요 인물들. 표정 속에서 섬뜩한 살기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마임을 취하고 있는 것일까.
베르디가 40일만에 작곡한 그의 17번째 작품인 '리골레토'는 빅토르 위고의 희곡 '환락의 왕 Le Roi's amuse'이 피아베의 대본으로 각색된 '리골레토'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방탕한 공작과 광대 리골레토, 리골레토의 순결한 딸 질다를 중심으로 한 저주와 복수, 살인이 벌어지는 베르디의 대표적인 드라마틱 오페라이다. 원작인 위고의 희곡은 주색에 악한 행실로서 이름난 국왕 프란시스 1세의 난행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당시 베네치아 정부는 전제정치에 대한 혁명사상의 움직임을 이유로 대본을 제출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베르디는 대본은 그대로 두고 장소가 파리인 것을 이탈리아의 만토바로 바꾸고 인물은 프란시스 1세를 만토바 공작, 트리브레를 리골레토로, 그의 딸 블란슈를 질다 등으로 고치고 제목도 '리골레토'로 하여 당국의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사연이 많았던 리골레토가 2007년 한국에서의 공연은 조금은 색다른 관점으로 해석 되었다. 난민촌 출신의 리골레토, 보트피플 출신의 자객인 스파라푸칠레, 만토바 공작은 다국적기업의 CEO인 두카로 변신하여 공연을 펼쳤다. 천편일률적으로 해석되던 기존의 공연과 달리 아시아의 눈으로 보여준 이번 오페라는 그래서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이 여자나 저 여자나 내겐 다 똑같소.
모두같이 아름답소.
나는 사람차별이 없소. 이 여자나 저 여자나
여자의 의미는 신이 준 것
오늘은 이 여자가 더 좋고, 아마 내일은 다른 여자가 더 좋을 거요.
부부간에 충실하다는 것 같이 어리석은 일은 또 없소.
원하는 자 혼자 충실하라.
다국적 기업 CEO인 두카를 섬기는 곱추 요리사 리골레토는 호색가인 주인을 부추겨 여자 찾아다니는 일을 거들지만, 두카에게 딸을 농락당한 몬테로네로부터 "리골레토 자네도 아비의 분노를 알게 될 때가 올것"이라는 저주의 말을 듣고, 딸 질다를 걱정한다.
그는 걱정이 기우이길 바랬지만…. 결국 학생으로 변장해 구애하는 두카를 그의 딸 질다가 사랑하게 된다. 그 때 걱정스러운 상황과는 달리 달콤한 사랑의 아리아가 흐른다. 'Gualtier Malde! Caro Nome (괄티에르 말데! 그리운 이름이여)' 순진한 질다가 괄티에르 말데라는 이름의 학생으로 변장한 두카를 사모하여 "내 그리운 사람의 이름, 잊을 수 없는 이름"하며 부르는 서정적인 사랑의 아리아. 질다의 아버지인 리골레토의 마음으로 듣는다면 사랑의 달콤함보다는 잘못된 사랑에 빠진 슬픔의 아리아로 다가올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그의 이름,
사랑에 빠진 심장에 낙인을 찍네요.
사랑스런 이름, 내 심장을 처음으로 두근거리게 만든 당신, 당신은 날 기쁨과 사랑으로 기억해야 해요.
나의 욕망은 생각의 날개를 달고 당신에게로 날아갈 거예요.
그리고 나의 마지막 숨결은 당신의 것이 될 거예요. 내 사랑.
베르디의 오페라 아리아 중 가장 사랑받는 아리아. 그것은 단연코 'La donna e mobile (여자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아리아는 초연 전에 거리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무대 연습 때에도 가수들에게 악보를 주지 않고 초연 날에야 겨우 악보가 전해졌다고 한다. 베르디의 생각대로 이 아리아는 공연이 끝난 후 모든 청중이 이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극장을 나섰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시대는 흘러도 음악의 힘은 변하지 않음인지 가장 사랑받는 아리아인 여자의 마음. 밝고 경쾌한 곡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 곡은 가장 비극적일 때 울려퍼진다.
리골레토가 두카의 시체가 들어있는 자루인 줄 알고 바다로 던지려 할 때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아리아. 그것은 분명히 두카의 노랫소리이다. 또 한명의 여자를 유혹하고 자신감과 여유에 찬 목소리로 부르는 아리아.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눈물을 흘리며 방긋 웃는 얼굴로 남자를 속이는 여자의 마음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여자의 마음 변합니다.
변합니다. 아~ 변합니다.
그 마음 어디에 둘 곳을 모르며 항상 들뜬 어리석은 여자여.
달콤한 사랑의 재미도 모르며 밤이나 낮이나 꿈속을 헤맨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여자의 마음은 변합니다.
변합니다. 아~ 변합니다.
살인과 증오로 점철된 비극적 오페라 리골레토. 지금은 1851년 초연 이래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프랑스에서는 대본의 기초가 된 희곡을 쓴 빅토르 위고의 강한 반발로 6년 동안이나 초연이 지연되기도 했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가 고집을 꺾고 오페라를 본 후에 "내가 연극에서도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네 사람이 동시에 감정을 표현하도록 할 수 있었다면 똑같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라며 4중창에 대해 느낀 매력을 피력했다고 한다. 그만큼 탄탄하게 짜여져 상황마다 매력적인 선율을 자랑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는 현 시대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오페라를 아시아적 관점으로 해석한다는 목표 아래 진행되었던 이번 공연이 등장인물들의 직업군만 '아시아 식'으로 바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심스레 고개를 든다. 창작 오페라가 아닌 색다른 연출이 목표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변신하려다가 만 베르디'가 정체성을 잃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