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가는 모름지기 덕장(德將)이 되어야 한다. 지략이 좀 모자라고 용맹성이 뒤떨어지더라도 직원을 내 가족처럼 사랑하고 키워 주는 아량이 없으면 기업은 흥하지 못하는 법이다. '기업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좋은 기계로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그것을 조종하고 더 좋은 것을 만들려는 창의성 있는 인재가 없다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동양화학 이회림 명예회장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 中)


   기업인이 존경받기 힘든 세상이다. 기업이 경제의 원동력이자 고용의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비자금과 분식회계, 편법 증여 등 여전히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단어들은 기업의 순기능적 이미지를 상쇄시키고 있다.

   그러나 지난 7월18일 한 원로기업인이 타계했을 때 사정은 달랐다. 후배 경영인들은 물론 정·관계, 문화예술계 인사들까지 고인을 기리며 깊은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고인은 동양제철화학의 창업자인 송암(松巖) 이회림 명예회장. 향년 90세였다. 당시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한 신문에 기고한 추도사를 통해 "비록 고인은 멀리 떠났지만 선생의 정신이 우리 경제를 지탱케 하고 나아가 장래에 분단 철조망이 끊어지는 날 통일과 번영의 터전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앞서 어떤 이는 인천항과 송도를 잇는 해안도로를 그의 호를 따 '송암대로'(松巖大路)로 명명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무엇이 이처럼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그를 각인시킨걸까. 그리고 개성 출신인 그가 인천과 맺은 인연은….

   #마지막 개성상인

   송암은 1917년 개성시 만월동에서 태어났다. 13세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당한 그는 14세에 점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신용과 근면성실, 근검절약을 중시하는 개성상인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1937년 건복상회 설립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사업가로서의 여정에 뛰어들었다.

   송암의 비누 사용 습관은 그의 검소한 생활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비싼' 비누는 손 씻을 때나 머리 감을 때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송암은 "남자는 웅지와 포부를 가지고 일을 펴 나갈 수 있는 기백이 있어야 하며, 사치나 교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생활했기 때문"이라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이후 송암은 1950년대 들어 국내에서 수출실적이 1, 2위를 다툴 정도로 규모가 컸던 개풍상사를 설립·운영했고 1955년 대한탄광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956년에 대한양회를 설립한 데 이어 1956년에는 고(故)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 등과 함께 서울은행을 창립하면서 우리나라에 산업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경제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1960년대에는 국가기간산업인 화학산업에 눈을 돌렸는데 이것이 인천과 끈끈한 인연을 맺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인천과의 끈끈한 인연

▲ 인천 소다회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왼쪽이 이회림 회장
   송암은 인천시 남구 학익동 앞의 바다를 매립하고 264만㎡의 공단부지를 조성, 1968년에 소다회 공장을 지었다.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는 화학산업을 국내 최초로 개척한 것이다.

   당시 심한 간만의 차에서 오는 조류로 공사 진척이 더딘데다 매년 찾아오는 폭우와 태풍으로 쌓았던 제방은 유실되기 일쑤였다. 결국 3년여의 갖은 고생 끝에 2천200의 제방공사를 마무리했고 현재 이 제방은 인천항과 송도를 잇는 해안도로로 인천의 중요한 산업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 도로를 '송암대로'로 명명하자는 제안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김용정 전 동양화학 그룹 (주)유니드 회장은 '동양화학… 그 인고(忍苦)의 발자취'란 글을 통해 "이 도로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 때 한 개인 기업가가 국가 보조도 없이 이런 거창한 매립공사를 결심하고 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노력의 결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실로 몇 안된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송암은 40여년간 오로지 화학산업 분야에만 매진했으며 그 결과 동양제철화학을 무기화학, 정밀화학, 석유석탄화학 분야에서 카본블랙, 핏치, 과산화수소, 과탄산소다, 소다회, TDI 등 40여종의 다양한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글로벌 화학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석탑산업훈장(1971년), 산업포장(1977년), 은탑산업훈장(1979년), 금탑산업훈장(1986년)에다 세차례에 걸친 대통령 표창은 한 우물을 판 기업가로서 산업발전을 이끈 그의 발자취를 가늠케 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또 한국과 프랑스간 경제외교활동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1986년과 1991년에 각각 기사작위와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시절의 추억

   송암은 경제발전 1세대로서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한국경영자총협회 이사,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한국무역협회 이사, 중앙노동위원회 위원, 한국중견기업연합회 고문 등 수많은 직함을 가졌다.

▲ 이회림 회장은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시절 우리나라 최초로 영세상인을 대상으로 한 이동 무료순회 상담소를 운영했다.
   이 중 인천상의 회장 시절이 각별히 기억에 남는지 자서전에 상당부분을 할애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는 1981년 인천상의 회장에 취임하고 나서 상근부회장제를 도입, 실무를 관장하게 하는 등 조직개편을 단행했는가 하면 상공회의소까지 찾아올 시간이 없는 영세상인들을 위해 순회 세무상담 및 기장(記帳)지도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차량을 이용한 순회 세무상담 등은 우리나라에서 인천상의가 처음 실시한 사업으로 기록된다.

   그는 또 인천상의 회장 당시 기능올림픽 선수들 중 교도소 재소자 선수들이 상을 받을 때마다 그들을 불러 회식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데 그는 습관적으로 밥을 빨리 먹는 선수들을 보면서 "야, 이 녀석들아! 밥은 천천히 먹고 반찬을 많이 먹어라. 거기 들어가면 이런 반찬 못 먹잖아? 밥은 영양이 적고 반찬에 영양가가 많으니 반찬부터 먹어!"하고 야단(?)을 친 기억을 자서전에 남겨두었다.

   1992년 남동공단에 인천상의 회관이 준공될 때는 '이 회관이 건립되기까지 제10·11대 회장을 역임하신 이회림 상임고문께서 이바지한 공로가 지대하였으므로 이를 기리는 전 인천 상공인의 고마운 뜻을 이 돌에 새겨 두다'라는 내용으로 회원들이 기념비를 세워주기도 했다.

   #장학사업 및 문화예술에도 남다른 관심 보여 

▲ 인천송암미술관
   송암은 1958년 대한탄광시절 송암장학회를 설립해 직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이후 사재를 털어 회림장학회를 설립해 본격적인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1979년에는 재단법인 회림육영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 이외에도 학술 문화부문에 연구비를 지원하고 불우이웃을 위한 자선사업을 펼쳤다. 1982년에는 인천 송도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송도중고등학교를 운영하면서 인재 배출에 힘썼다. 특히 2005년에는 평생 모은 문화재 8천400여점과 송암미술관 일체를 인천시에 기증, 평소 소신이었던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정신을 실천하기도 했다.

   송암은 붓을 들면 교훈이 될 만한 글귀를 써서 직원들의 사무실 벽에 걸어주고는 했는데 '부족하거나 지나치지도 않으며 편중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을 담아 '중용처세'(中庸處世)란 글귀를 자주 썼다고 한다.

   모든 이에게 성공한 기업인으로 기억되는 송암도 IMF의 한(恨)은 가슴에 묻어둔 채 하늘로 간 듯 하다. 그는 자서전 말미에 "친형제와도 같은 일부 임직원이 용퇴한 것은 내 살을 베어 낸 것과 같은 아픔으로 지금도 남아있다"고 적고 있다.

   송암의 유족으로는 이수영 동양제철화학 회장과 이복영 삼광유리공업 회장, 이화영 유니드 회장 등 3남3녀가 있다.

<임성훈기자·ho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