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한 산업화에 앞만 보고 질주해온 재계는 근대화에 산 주역으로 치켜세워지며 정권이 바뀌어도 '적당한' 타협과 뒷거래를 통해 온갖 비리가 상당부분 묵인돼 온 것도 사실이다.
아니 국민들조차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재계가 만든 마법의 성에서 탈출하지 못해온 게 지난 수십년이었다.
이런 재계의 성역이 지난 한해 봇물 터지듯 무너지며 재계의 제2도약을 위한 도덕적 권위가 바로 서야 한다는 각계의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
# '돈만 벌면 만사 OK' 재계의 일그러진 자화상
또 재벌 총수가 아니더라도 삼성전자, LG필립스LCD, 건설업계, CJ제일제당 등 식품업계, 대한항공, STX중공업 등 적지 않은 대기업들이 국내외에서 담합, 재개발비리, 기술유출 등의 혐의로 사법이나 공정거래조사 당국 등으로부터 조사나 처벌을 받았다.
삼성은 이 회장의 취임 20주년을 맞아 그의 경영 성과를 볼 때 나름대로 자축연을 가져도 됐건만 예년에 없었던 악재가 한꺼번에 터져 그룹이 큰 위기를 겪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봄부터 그룹의 '캐시카우'인 반도체 실적 악화설에 시달려야 했으며 여름에는 초일류 첨단시설로 자부하던 삼성전자 기흥반도체 공장에서 정전사고가 발생해 '불패'의 삼성 관리 시스템에 구멍이 뚫린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았다.
이 회장 취임 2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던 가을에는 법무팀장을 지냈던 김용철 변호사가 비자금조성, 전방위 로비, 경영권 승계 비리 등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양심선언을 감행함으로써 삼성과 재계는 물론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다. 김 변호사의 폭로 사태 초기만 해도 삼성은 "근거없는 음해"라며 '원칙대로, 법대로' 대응한다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의 폭로가 검찰 수사, 특별검사 도입 등으로 이어지면서 예상치 못한 위기에 빠졌다.
# 헛구호로 끝나는 '글로벌 경영'
글로벌 신인도 추락은 삼성전자가 노키아, 도시바, 인텔 등 세계 초일류 기업들과 해외시장에서 치열한 생존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경쟁 낙오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을 낳고 있다.
국제시장 상황에 민감하고 수조원대의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전자업계의 특성상 기술개발, 투자 결정의 '반 발짝' 차이로 업계 1, 2위가 바뀌고 선두주자였다가 한순간에 무대 뒤로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삼성의 경영 위기가 실적 악화, 국내 경제 타격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또한 적지 않다.
삼성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매출액은 국내총생산(GDP)의 18%, 시가총액은 상장사 전체 시가총액의 20%, 수출은 한국 전체 수출의 21%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현대·기아차그룹은 2006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비자금 사태로 인한 여진을 감내해야 했다. 정몽구 회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재판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원이 지난해 2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한데 이어 9월 2심에서 집행유예 5년에 사회봉사명령을 내림으로써 정 회장을 비롯한 현대·기아차그룹은 일단 한시름을 던 상태다. 정 회장은 이 과정에서 4월부터 6월까지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대법원 상고가 남아있으나, 이는 준법경영을 주제로 한 강연·신문기고 등 사회봉사명령에 관한 것이어서 2심의 '집행유예'라는 판결은 뒤집히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현대·기아차그룹은 지난해 국세청으로부터 세무조사도 받았다. 2006년 불거진 비자금 사건에서 파생된 것으로 현대차와 기아차, 글로비스, 엠코 등 그룹 계열사들이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밖에 삼성전자와 LG필립스LCD는 LCD 제품의 가격 인상과 물량 제공 등을 담합한 혐의로 공정위와 미국 법무부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다.
대우건설, 삼성물산, 현대건설, GS건설, 대림산업, SK건설 등은 서울지하철 7호선 연장공사의 공사권을 따내기 위해 '나눠 먹기' 식으로 담합한 것으로 공정위 조사에서 드러나 221억원의 과태료 처분을 받고 검찰에 고발됐다.
삼성물산은 재개발관련 비리혐의로 본사 압수수색을 받았고 CJ제일제당과 삼양사, 대한제당 등은 15년간 설탕 유통량과 가격을 통제하는 등 담합해 1조원에 이르는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기소됐다.
대한항공은 미국에서 승객 및 화물운임을 담합한 혐의로 3억 달러의 벌금을 물면서 지난해 경영 목표에 타격을 받았으며 STX중공업은 사장과 상무 등 핵심 임원이 전 직장인 두산중공업으로부터 담수·발전 플랜트 핵심 기술을 빼낸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 모럴해저드(moral hazard)와 천민자본주의 합작품
한화는 김승연 회장의 아들 보복폭행이라는 '비즈니스 밖 사건'으로 경영 차질을 빚는 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어찌보면 천민자본주의의 실상을 세상밖에 여실히 드러낸 이 시대 우리사회 재벌들의 모럴해저드의 심각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김 회장은 지난해 3월 술을 마시다 시비가 붙어 부상한 둘째아들(22)의 보복을 위해 폭력배 등을 대동한 채 아들과 다퉜던 상대방을 폭행한 게 뒤늦게 알려지면서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다. 그는 최초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대기업 총수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그 탓에 한화는 기업이미지에도 적지않은 타격을 입었다.
# '신이 내린 직장' 공기업은 언제까지?
공기업ㆍ준정부기관ㆍ기타 공공기관 등으로 구분되는 295개 공공기관은 지난 5년간 정부로부터 출연ㆍ출자ㆍ보조금으로 180조원을 지원받았으나 2006년 말 부채는 400조원대로 2002년(300조원)보다 34% 늘었다. 그런데 직원수는 42%, 인건비는 78% 각각 증가한 27만6천여명과 13조3천억원에 이르렀다. 이런 지표만으로 공익성과 수익성을 함께 추구하는 공공기관의 경영을 단순 평가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누리는 처우ㆍ신분ㆍ복지에 걸맞게 경영효율성을 높여왔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 큰 문제는 국정감사나 감사원감사 때마다 조직이기주의와 과도한 복지, 낮은 생산성과 도덕적 해이 등의 행태가 지적됐지만 눈 앞에서 개선 시늉만 내고 뒤로는 기득권을 더욱 강화해왔다.
감독책임이 있는 정부부처도 '훗날의 자리' 등을 의식해 알게 모르게 방만한 행태를 묵인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과 프랑스의 경우 정권의 명운을 걸고 공공부문의 저항과 로비를 이겨낼 수 있었다.
우리 사회 전분야가 해부되고 있는 이 마당에 공기업을 포함한 재계에 도덕적 권위를 세우라는 주문은 너무 늦은 감이 많다. 국민들의 진정한 사랑과 근로자들의 건전한 근로의욕을 고취시키는 길은 탈·불법으로 돈버는 잔재주가 아니라 폼나는 도덕적 권위임을 재계가 진정 깨달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