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출입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요란하게 울린다. 맑은 쇳소리에 느긋하게 풀어졌던 여자의 감각이 조급하게 오므라든다. 수은주의 온도가 갑자기 내려간 날이면 풍경소리는 더 쟁쟁하고 여운도 오래간다. 여자는 몇 모금 빨지도 못한 담배를 서둘러 비벼 끈다. 치약을 짜놓은 칫솔을 입에 물고 하수저장고의 스위치를 꽂는다. 위이잉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빠른 소용돌이가 일며 물살이 뒤엉킨다. 여자는 몸을 숙여 깊고 어두운 하수저장고 속을 들여다보며 양치질을 한다. 굵은 플라스틱 파이프가 잠겨 있는 물은 검다. 물을 많이 쓰지 않는 겨울철에는 사흘에 한 번씩만 돌려도 하수저장고의 물이 넘칠 일은 없다. 물이 다 빨려 들어갈 때까지 여자는 윗몸을 숙인 채 칫솔질을 멈추지 않는다. 저장고 바닥에 고여 놓은 벽돌의 한쪽 귀퉁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여자는 모터의 전기 코드를 뽑는다.

"안에 있는 거야?"

까칠한 백양클리닝의 목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으이 추워!" 깃털을 털듯 진저리를 쳐대는 철물점 여자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스완뜨개방을 들락거리는 고정 멤버들이다. 철물점은 딸의 스웨터를 짜고 있는 중이다. 남편이 설비 일을 나갈 때는 여자가 가게를 보지만 일이 없어 남편이 가게를 보는 요즘, 철물점은 스웨터를 핑계로 거의 뜨개방에서 낮 시간을 보낸다. 덩치가 좋고 수수한 성격에다 입성이 대충인 철물점과는 달리 백양클리닝은 시장통 사람들이 알아주는 멋쟁이다. 남편은 허구한 날 빨랫더미에 파묻혀 허리 펼 짬이 없는데 여자는 세탁소 일엔 아예 관여하지 않는다. 백양클리닝은 반짝이가 살짝 박힌 진보라색 슬러브사에 같은 색상의 순모를 섞어 사각 숄을 짜고 있다. 꼬임이 많고 털이 긴 슬러브사는 무늬 없이 겉뜨기와 안뜨기만 한 단씩 섞어 짜도 그 자체로 포근하고 풍성해 보인다. 실의 색상을 고를 때도 까탈을 부리며 이것저것 집적거리더니 성격마저 진득하질 못해서 숄이 언제 완성될지는 알 수가 없다. 무슨 얘기들을 나누는지 늘 삐걱거리던 두 여자의 힐힐거리는 웃음소리가 제법 길다. 어지러운 웃음소리는 하수 파이프 속으로 빨려들던 소용돌이처럼 여자의 몸을 휘감는다.

자는 입을 헹구고 세면실 벽에 가로로 길게 누운 거울을 들여다본다. 요사이 부쩍 밤잠을 설친 탓인지 조막만한 얼굴은 부스스하고 등의 혹은 더 도드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해가 짧은 겨울철에 여자의 얼굴은 거의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다. 사계절 내내 바깥출입이 드문 편이지만 유독 겨울이면 더하다. 겨울이 닥치면 여자의 몸은 유리그릇처럼 투명해져서 제 몸을 이루고 있는 연약한 뼈마디들이 툭툭 불거지는 것만 같다. 구루병은 일종의 비타민D와 일조량의 부족 때문에 일어난다고 배웠다. 태양광선 일수가 많은 지역이나 생선을 많이 먹는 북극 사람들은 꼽추가 드물다는 걸, 더구나 꼽추는 유전병이 아니라는 걸 구루병을 배울 때 들었던가. 그때 여자는 의식적으로 햇볕을 쬐기 위해 애썼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가 수업을 받을 때면 혼자 교실 뒤편의 햇볕이 고인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서서 입을 커다랗게 벌리곤 했다. 여자의 손을 꼭 잡고 유독 습하고 그늘진 곳만 골라 걷던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몸집이 작고 가냘팠던 어머니는 손만은 사내처럼 거칠었다. 손마디 곳곳에 굳은살이 딱딱하게 집혔다. 쇠골무를 끼고 바느질을 하는데도 그랬다. 혼수 이불을 꿰매는 돗바늘에 눌린 자국들이 골무의 크기만큼 굳은살을 만들었다. 바느질품을 팔며 생계를 이었던 어머니는 한밤에도 여자의 머리맡에 앉아 바느질거리를 붙잡고 있었다. 햇빛을 못 보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곧은 몸을 가지고 살았지만 병신자식보다 더 등을 구부린 채 살아온 사람이 어머니였다.

"뭐하느라 안에서 그렇게 꿈적대?"

여자가 가게 마룻방으로 들어서자 뜨개질거리를 펼쳐놓던 백양클리닝이 기다렸다는 듯 여자의 시선을 붙든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입이 근질거려 못 참겠다는 표정이다. 여자는 엉덩이 자국이 난 방석을 끌어다 앉는다. 무릎덮개로 무릎을 감싸고 밀쳐두었던 뜨개질감을 잡는다. 철물점은 벌써 전기장판이 깔린 바닥에 질펀하게 앉아 재게 손을 놀리고 있다. 어두운 계열의 그레이와 엷은 보라가 층을 지어 염색된 날염 혼방사를 7㎜짜리 대바늘로 꽈배기 무늬를 넣고 있는 앞판은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다. 백양클리닝처럼 호들갑스럽지 않은 철물점도 뭔가를 은근히 참고 있는 듯 얼굴에 웃음기가 남아 있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글쎄, 우리가 오다보니까 천왕사가 유리문에 딱 붙어서 요렇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잖아. 채신머리없이 그게 무슨 짓이야. 지나가는 사람들 눈도 있는데."

백양클리닝은 앉은 자세에서 엉덩이를 쑥 빼고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어 흉내까지 낸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남세스럽긴 하지. 그래도 뭐 무슨 볼일이 있어 그랬겠지."

철물점의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백양클리닝이 발끈한다.

"볼일은 무슨. 저번 언젠가도 그러고 있는 걸 내가 봤는데. 스완이 기분 나쁠까봐 말은 안 했지만 아니, 사내가 뜨개질방에 볼일이 있을 게 뭐야. 그렇잖아도 갈고리 같은 그 눈만 마주쳐도 어깨가 뻣뻣한 게 기분이 나쁜데. 스완은 이상한 낌새 못 챘어?"

별 뜻 없음을 가장한 그 물음 속엔 단순하지 않은 호기심과 의구심이 깔려 있다. 점집 홀아비와 뜨개방의 꼽추 여자. 근거 없는 추문은 애드벌룬처럼 사람들 사이를 둥둥 떠다닐 것이다. 여자는 대꾸 없이 뜨개바늘만 놀린다. 생수남자의 키를 눈대중으로 가늠해 게이지를 냈지만 뒤판이 완성되고 앞판의 모양새가 얼추 잡혔을 땐 그의 몸을 만져본 것처럼 실감이 왔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 저녁 전에는 조끼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마음속에 묻어둔 생각이 겉으로 드러날까봐 애써 태연한 척 백양클리닝의 궁금증을 피해간다. 말꼬리를 잡히면 돌고 도는 말의 타래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수다스러운 여자들의 입을 통해 주인인 천왕사 남자의 필리핀인 아내가 한 달 만에 도망을 쳐버렸다는 것도 알았다. 놀란 토끼처럼 눈이 똥그랗고 얼굴이 기름칠을 먹인 것처럼 까맣게 윤기가 났다던 어린 그 여자를 문밖출입조차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제 터도 못 닦는 주제에 무슨 점쟁이냐고 대놓고 힐난하는 소리 역시 여자들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들어오는 가게마다 수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장사를 접었다고 했다.

재래시장 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이 가게는 목이 좋지 않았다. 시장 중앙통의 사거리를 중심으로 온갖 상점들과 난전이 북적대는 위쪽과는 달리 아래쪽으로는 살림집들이 섞이면서 풀이 죽어 있었다. 여자가 들어오기 전에는 건강원이 들어 있었다. 유리문에는 개소주? 흑염소? 생사탕? 각종 과일즙을 저렴한 가격에 내려준다는 선팅지가 미처 떼어내지 못한 채 붙어 있었고, 시멘트 바닥엔 석유물이 든 듯 거무스름한 얼룩이 져 있었다. 세제를 잔뜩 묻힌 철수세미로 바닥을 닦아내는 동안에도 과즙과 뒤섞인 들큼한 냄새가 나는 듯해 여자는 바닥을 문질러 닦고 또 닦았다. 가겟방 뒤로 낮게 턱이 져 있던 곳은 여자가 들어오면서 미닫이문을 달아 살림방으로 꾸몄다. 옷장과 침대를 놓자 꽉 찬 그 방은 애초에 비품이나 물건들을 쟁여두고 창고처럼 쓰던 곳이었다. 그 안쪽으로 개수대가 놓인 부엌 겸 좁다란 세면실이 있고 뒤쪽 깊숙한 구석에 하수저장고가 있었다. 배수관이 시장통 안으로 흐르는 하수관으로 바로 연결이 되지 않아 모터를 설치해서 물을 빼낸다. 처음 이 가게를 보러 왔을 때 여자는 미궁처럼 검게 뚫려 있는 하수저장고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절망적이고 음침한 기운이 몰려 있는 하수저장고가 마치 여자가 등에 지고 있는 혹처럼 여겨졌다.

"천왕사가 스완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어. 정말 이상한 낌새 못 챘어?"

백양클리닝의 말에 여자는 핏기 가신 창백한 얼굴로 웃고 말 뿐 돌돌 말린 실꾸리에서 실을 풀어내 왼손 검지에 걸고 재게 뜨개바늘을 놀린다.

"고깝게 생각하지 마. 누가 스완이 그렇데? 천왕사가 좀 음충맞아야지. 사내란 그저 점쟁이 할아비가 아니라 천왕신이라도 다 똑같은 거야."

백양클리닝의 푸른 눈썹 문신이 갈매기 모양으로 휘어졌다 내려오며 슬쩍 여자의 온몸을 훑듯 스쳐간다. 말 따로 마음 따로, 때로 사람의 마음이란 체에 까불리는 겨와 같다. 학교 때 친구들도 하나같이 그랬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돌아서면서 슬쩍슬쩍 곁눈질로 여자의 등을 쳐다보곤 했다.

문은 어디까지 갔을까? 주인남자가 황토색 개량한복 위에 올겨울 들어서부터 껴입고 다니는 회색 스웨터가 여자의 솜씨라는 것쯤은 눈치챘을 것이다. 해묵은 작품이었다. 톡톡한 순모사로 앞섶을 갈라서 싸개단추를 달고 양쪽에 넉넉한 주머니를 넣었다. 친정아버지 생신 날 드릴 선물이라며 날짜를 맞춰 달라고 다짐까지 두며 재촉하더니 스웨터를 부탁했던 손님은 이사하는 날까지 나타나지도 않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여자가 포장지에 싼 스웨터를 들고 천왕사로 올라간 건 계약서를 쓸 때 올라가 본 후로는 처음이었다. 다소 요란스럽다 싶게 차려놓은 암자의 불당 같은 내부는 출입구부터 연등이 치렁치렁 걸려 있었다. 키가 작은 여자의 머리에는 닿지 않았지만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숙여야만 할 것 같았다. 전세금이 모자라 차액을 월세로 물기로 하고 들어왔는데 몇 달째 주인남자는 여자가 준비한 월세를 받지 않았다. 검은 올리브색으로 옻칠이 된 탁자를 앞에 놓고 평상다리를 하고 앉은 주인남자 앞에 포장지 꾸러미를 내려놓으면서 여자는 얇은 속이 비치는 것 같아 손이 부끄러웠다. 주인남자는 언제 보아도 표정이 없었다. 울긋불긋한 단청으로 도배된 전면 벽의 험상궂은 탱화 속 신상을 떠다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주인남자는 여자가 밀어놓은 포장지 꾸러미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팔자에 자식이 아주 없는 게 아니야. 접신이라도 된 듯 덩치와는 다르게 앵앵거리는 주인남자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부처님 손바닥이란 말이 왜 있겠어. 미물 같은 인간들은 지 처지도 모르고 팔자소관을 거스르려고 날뛰지만 엥, 빌어! 빌어서라도 팔자에 있는 떡 부스러기라면 받아먹어야지. 여자는 까닭 없이 목덜미가 뜨거워지고 귓불이 붉어졌다. 마치 제 속에 품은 갈망과 생의 속살을 들켜버린 것처럼.

엉덩이가 푼더분하게 처진 바지저고리에 걸쳐진 스웨터 양쪽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등뼈를 늘인 짐승처럼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았을 주인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좀처럼 얼굴을 부딪치지 않지만 어쩌다 뒷마당 한쪽 구석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올 때 이층 난간에 서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칠 때도 있었다. 먼저는 무안한 감에 눈을 피하지만 황급히 부엌 쪽문을 통해 가게 안으로 들어올 때는 뒤가 당기는 느낌에 번번이 몸이 허청거렸다. 하수저장고를 들여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도 이층 계단을 밟는 주인남자의 둔탁한 발소리가 들리면 여자는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럴 때면 여자 외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부엌 쪽문의 잠금 고리를 새삼 확인하곤 한다.

"구절양장 같은 사람 속을 들어가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아. 하여간 사람들이 천왕사를 찾아오는 걸 보면 아주 알조는 아닌가 봐."

코를 쑥 빠뜨리고 뜨개질에 열중이던 철물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올해 쉰인 철물점은 얼마 전에 첫 손녀를 보았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딸이 아이를 낳았다고 쉬쉬하는 눈치더니 백일 지난 손녀딸을 데리고 뜨개방에 나와서는 아까워서 어쩔 줄 몰라 쪽쪽 빨았다. 여자는 보드라운 강보에 싸인 아기를 품에 안아 보았다. 오물거리는 입과 말랑거리는 코, 흑체리 같은 홍채가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기의 순두부 같은 살갗에 볼을 비빌 때 한 번도 무언가를 품어보지 못한 여자의 자궁에 더운 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철물점은 딸의 인연에 낀 액운을 아기가 덮었다는 천왕사 말을 믿는 눈치였다.

"사위자리가 영 마음에 안 들었어. 뭘 먹고 살는지, 철없는 것들이 저질러놓은 일이니 어쩔 수 없긴 했는데, 애 낳고 사위가 정신을 좀 차리는 것 같아. 이젠 직장도 잡았어."

"그거야 뭐 점쟁이 아니라도 할 소리구만. 자식이 눈앞에서 꼬물거리는데 아무리 철없는 애비라도 그렇지. 지들 둘만 있을 때랑 똑같겠어?"

백양클리닝이 입을 삐죽대며 받아친다.

"그래도 뭐가 보이니까 큰소리를 치지. 아닌 말로 점쟁이는 귀신과 노는 사람인데, 아무렴. 요기 찻길 맞은편에 식당하다 이불가게 낸 여편네는 아주 천왕사에 엎어져 사는데 하나 틀린 것 없이 딱딱 맞춘다던데 뭐."

"그랬겠지. 갖다 바친 게 얼만데."

백양클리닝은 여전히 못마땅한 듯 비죽거린다.

"조상 중에 객사한 사람이 많아 비렁뱅이들이 달려든다고 먹는 장사는 안 된다잖아. 몇 번씩 간판을 갈아치우던 그놈의 식당 엎고 이불가게 차려서는 제법 장사가 되잖아. 천왕사가 그런 거 하나는 아주 용하게 본다는데."

철물점은 백양클리닝의 심사가 꼬일수록 능청스레 말을 늘인다.

"거기가 어디 식당 자리야? 주변이 죄다 옷가겐데. 지나가던 삼척동자도 다 알겠다."

양클리닝은 사사건건 철물점 말에 어깃장을 놓는다. 수세에 몰리면 백양클리닝의 까칠한 목소리는 말끝이 딱딱 부러진다. 여자는 온수기 앞에서 커피를 탄다. 종이컵에 인스턴트커피 믹스를 하나씩 넣고 더운 물을 뽑는다. 18리터들이 푸른 물통의 수위는 거의 바닥이다. 여자는 온수기에 붙어 있는 아쿠아 유통 스티커를 들여다본다. 생수남자의 휴대폰 번호가 상호 밑에 적혀 있다. 남자는 언제든 전화만 하면 달려올 것이다. 생수통을 한쪽 어깨에 짊어지고 가게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냉온수 기기에 물통을 꽂아주고, 빈 통을 내가면서도 여자의 눈을 한 번도 바로 쳐다본 적이 없다. 마치 여자의 등에 솟은 혹에 눈이 닿을까봐 무안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럴 때면 여자는 투박하고 넓적한 그 남자의 손이 자신의 등에 닿는 감촉은 어떤 느낌일까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여자의 등을 쓸어준 사람은 오로지 어머니밖엔 없었다. 어머니의 손이 등을 쓸 때마다 가시가 박힌 듯한 등뼈에 따뜻한 온기가 돌아 여자의 온몸이 부드러워지곤 했다. 사람들은 감히 여자의 만곡이 심한 등을 만져볼 생각 같은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자는 늘 외로웠다. 좀 모자라긴 해도 그저 사람 심성 하나만 착하면 아무것도 난 바라지 않는다. 내가 널 치우지 못하고 가면 어쩌누…. 어머니의 소원은 그 한 가지였다. 만약 어머니가 생수남자의 선한 눈을 봤더라면 어머니 눈에 꼭 차지 않았을까. 행복한 하루 되세요. 물통을 올려주고 돌아서면서 남자는 한 번도 그 말을 빠뜨린 적이 없다. 어눌하고 더듬거리는 말투였지만 여자에겐 그 말이 따뜻하고 정겹게만 들렸다. 나이 마흔 넘은 노총각이래. 요새 장가 못 간 총각들이 얼마나 수두룩한데. 괜히 딴 나라까지 가서 여자들을 데려오겠어. 이사를 왔을 때 생수집을 연결해주며 철물점 여자가 귀띔한 말이다.

"하여튼 난 여기 와서 마시는 커피가 젤 맛있어. 이거 한 잔 안 마시면 하루 종일 체기가 안 내려가는 것 같아서 원."

철물점 말에 백양클리닝은 못 들은 척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면서 여자에게 묻는다.

"이건 또 남자 조끼 같은데?"

백양클리닝은 여자가 뜨고 있는 조끼를 끌어다가 손으로 비벼대면서 눈을 빛낸다.

"스완은 뜨개질 솜씨는 타고났어. 뭐든 시작만 하면 뚝딱 만들어내잖아. 우리 나이 때들은 어려서부터 뜨개질도 숱하게 했는데, 난 좀이 쑤셔서 못 하겠더라고. 주문받은 거야?"

그 말에 대답은 않고 여자는 희미하게 웃을 뿐이다. 뜨개질거리를 잡고 있으면 마음속의 번민이 가라앉듯 한순간 몸이 고요해지면서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하지만 이 조끼를 처음 잡았을 때부터 여자는 가슴이 덤벙거려 자주 코를 빠뜨리고 허황되게 마음이 달뜨곤 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여자도 알 수가 없다.

"군청색에 벌집무늬가 도도록하게 살아나니까 궁상맞을 것 같은 색깔이 처지지 않고 좋아 보이네. 나도 얇은 바늘로 좀 얌전하게 떠서 그 무늴 넣을 걸 그랬나."

철물점도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고 백양클리닝이 만지고 있는 조끼를 건너다본다.

"난 저 마네킹이 걸치고 있는 스웨터만 보면 탐나더라. 맘 같아서야 하나 해입고 싶지만 내 솜씨론 어림도 없고, 이거 끝내면 볼레로나 짜서 입어야지. 요샌 그게 유행이라며?"

백양클리닝의 말에 여자는 마네킹이 걸치고 있는 스웨터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순모와 폴리에스테르 합성사로 진분홍과 감색, 회색과 아이보리, 자주색을 섞어 그러데이션 기법을 살린 터틀넥스웨터는 170센티미터의 가늘고 긴 몸매를 가진 마네킹에게 더할 수 없이 어울린다. 완성된 터틀넥스웨터를 마네킹에게 입힐 때는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여자의 손끝이 떨렸었다. 그런 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안타까웠던 적은 있었지만 마흔이 다 되도록 여자는 옷에 대한 욕심을 부려본 적은 없었다. 올이 굵은 실로 두툼한 풀오버나 망토를 떠서 걸친 게 전부였지만 마네킹을 쳐다볼 때마다 여자의 눈은 아득해지곤 한다.

뜨개질하던 손놀림이 자기도 모르게 느려진 여자는 가게 앞을 지나가다 되돌아와 선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뜨개 모자를 푹 뒤집어쓴 턱이 뾰족하고 깡마른 여자의 얼굴이 낯익은 듯하다. 젊은 여자는 마네킹이 걸친 터틀넥스웨터를 쳐다보고 있다. 옷이 마음에 들면 들어와 가격을 물어보는 이도 있지만 대개는 눈독만 들이다 그냥 가기 십상이다. 한낮의 짧은 햇살을 받고 선 여자의 얼굴이 희다 못해 푸르게 보인다. 여기저기에 걸어놓은 자잘한 뜨개 소품에서 피어나는 미세한 보풀 같은 먼지가 가게 안을 파고든 햇살에 실려 마네킹의 어깨위에 내려앉는다. 문밖의 젊은 여자는 한참만에야 문을 열고 들어선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젊은 여자가 마네킹이 걸치고 있는 터틀넥스웨터를 가리키며 가격을 묻자 백양클리닝과 철물점이 더 호기심을 보인다.

"정해진 가격은 없어요. 사신다면 실값하고 수공비 조금 더 얹어 받는 건데…."

여자는 천천히 뜨개바늘을 놀리며 손님을 쳐다본다.

"그러니까 얼마냐고 묻잖아."

철물점이 말끝을 흐리는 여자에게 다그치듯 묻는다.

"칠만 원은 받아야 해요."

"그것 받아서 되겠어. 내 숄만 해도 실값이 그만큼은 들어가는데."

여자의 말에 백양클리닝이 손님 눈치를 보며 입바른 소리로 거든다.

손님은 옷이 마음에 드는지 마네킹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다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가게 문을 열고 나간다. 손님이 그냥 나가버리자 철물점과 백양클리닝이 더 실망하는 눈치다. 꼭 팔아야겠다고 뜬 것도 아니어서 임자가 있다면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고 마냥 마네킹이 걸치고 있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써 점심 차릴 때가 되었다며 철물점이 뜨개질거리를 챙겨 일어나자 백양클리닝도 싱겁게 따라 일어선다. 동네 여자들이 몰리는 날은 하루 종일 들락거리는 사람들로 뜨개방이 북적이고 오늘처럼 한가한 날은 철물점이나 백양클리닝도 심심한 풍경에 마음을 못 붙이고 일찍 자리를 떠버리기도 한다. 짤랑거리는 풍경소리가 어지럽게 흩어지고 나자 써늘한 한기와 함께 여자의 가슴에서 썰물이라도 빠져나간 듯 쓸쓸함이 묻어난다. 하긴 백양클리닝이나 철물점 여자가 아니라면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 손님 하나 들지 않는 날도 있다. 여자는 언제나 혼자 있는 일에 익숙하다. 뜨개실을 사면 뜨개질을 가르쳐준다는 쪽지를 문 앞에 붙여 놓았지만 진득하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 뜨개질을 배우는 사람도 거의 없는 편이다. 겨울 한철을 보고 하는 장사지만 갈수록 손뜨개 수요는 줄어들고 있다. 가게 목이 나빠서만은 아니라는 걸 여자도 알고 있다. 여름에는 유리장식장 속의 묵은 뜨개실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헤어핀이나 액세서리 같은 걸 들여놓아볼 생각이지만 뜨개방을 걷을 생각은 없다.

여자는 짜고 있던 조끼를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 부엌문 옆에 세워진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고 전기밥솥에서 밥을 푼다. 입 안이 껄끄럽다. 아침부터 커피 외에는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다. 식욕이 동하지 않는데도 여자는 개수대 위에 반찬그릇을 올려놓고 밥그릇을 한쪽 손에 든 채 마른 밥을 한 술씩 떠 넣는다. 혼자 먹는 밥만큼 서러운 건 없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난다. 은연사 대웅전에 모셔놓은 어머니의 기일이 내일이다. 세상없어도 여자는 그 날 하루만은 문을 닫아걸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다. 두어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도심 속의 절간이지만 여자는 거기서 온전히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다.

김치 조각 몇 개로 마른 밥 반 공기를 겨우 비운 여자는 설거지거리를 개수통에 몰아넣고 하수저장고 곁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여자는 조금씩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때로 유일한 위안이 된다. 하수저장고 위로 난 철제 계단을 딛는 발자국 소리가 공명통처럼 여자의 머리 위에서 텅텅 울린다. 발자국 소리에 여자는 몸을 더욱 쪼그리고 앉는다. 손님인가? 먼 곳에서 알음알음으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거개가 여자들이다. 뒤로 돌아앉은 천왕사의 출입문을 찾지 못해 뜨개방에 들어와 천왕사가 어디냐고 묻는 여자들도 간혹 있다. 담뱃불을 끈 여자는 세면실 바닥의 수챗구멍 근처에서 오줌을 눈다. 날이 추워진 뒤로는 바깥에 딸린 화장실은 대변을 보는 일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그나마도 기온이 더 떨어져 화장실 수도꼭지가 얼어붙으면 물을 퍼 날라야 할 형편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여자는 한 번도 바깥엘 나가보지 않았다.

게로 나온 여자는 둥굴레 티백을 머그컵에 담아 온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는다. 컵 7부까지 물이 차자 물이 쫄쫄거린다. 정기적으로 물이 오는 날은 내일인데, 하루 상간으로 물이 떨어진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은 가게문을 닫아야 한다. 여자는 뜨개질거리를 끌어당기며 시계를 쳐다본다. 서너 시간 후면 조끼는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뜨거운 둥굴레차 한 모금을 머금자 생수남자의 몸에서 나던 은근하게 무른 짚 냄새가 나는 듯하다. 겨울이 닥쳐왔는데도 남자의 옷차림은 허술했다. 여름내 반소매 티셔츠에 주머니가 주렁주렁한 망사조끼를 걸치고 다니던 것을 벗고 팔목이 긴 셔츠 위에 아쿠아유통 마크가 새겨진 푸른색 작업복을 걸치긴 했지만 홑겹의 작업복은 소매 깃이 날깃날깃했다. 때로 빈 물통을 들고 나간 남자가 문밖에 세워둔 트럭에 휙 올라타 시동을 걸 때는 여자의 몸도 딸려 갈 듯 떨렸다.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하루 종일 남자를 따라다니며 사람 사는 세상의 복잡한 길들을 달려보고 싶었다. 매일 배달을 다녀요? 예. 거래처가 많아요. 수금은 잘 되나요? 아니요. 그것 때문에 사장님한테 자주 꾸중 들어요. 여기처럼 또박또박 주는 데가 많지 않아요. 남자는 여자의 오죽잖은 궁금증에도 친절하게 대답했다. 우린 먹어봤자 겨우 얼마밖에 안 되는데…. 여자가 미안한 듯 웃었다. 아, 아닙니다. 끊지만 말고 계속 먹어주세요. 제법 길게 대화를 나눌 때 그는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면서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그러다 문을 열고 나갈 때면 문밖에서 자신감이 실린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남자의 목소리가 풍경소리보다 긴 여운을 남기며 되살아난다. 그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주제넘은 생각은 여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남자의 조끼 단이 한 올 한 올 더해질 때면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늘 뜨개옷을 해서 입혔다. 거친 나일론사로 뜬 노란색의 단추 달린 스웨터는 소매 깃에 누런 콧물이 묻어 빤질빤질했다. 스웨터의 팔목이 짧아지자 어머니는 실을 풀어 조끼를 짜 주었다. 바느질하는 어머니 옆에서 여자도 뜨개질을 했다. 어머니가 쓰던 대바늘로 보풀이 피거나 자투리로 남은 실을 가지고 머리띠나 짧은 목도리 따위를 떴다.

코를 빠뜨려 전전긍긍하고 있으면 곁눈질로 건너다보던 어머니가 잃어버린 코를 찾아 주었다. 우리 딸 뜨개질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 바느질로 먹고 살 팔잔가? 어머니는 한숨을 푹 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여자는 제 손으로 조끼를 짜 입었다. 가사시간에 뜨개질 실기가 들어 있을 때면 생전 여자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던 친구들이 몰려들어 수업 시간에 한 것을 묻곤 했다. 겨우 메리야스뜨기나 고무뜨기로 목도리를 뜰 수준밖에 안 되는 아이들은 선생이 내는 실기 숙제를 여자에게 부탁해오기도 했다. 여자는 친구들이 부탁을 해오면 거절할 줄 몰랐다. 생전 남에게 부탁 같은 걸 받아본 적이 없는 여자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줄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꼭 실기 점수를 만점 맞아야 1등을 놓치지 않는다고 부탁한 친구의 장갑 한 켤레를 밤새 뜨기도 했다. 여자는 마법에 걸린 엘리자를 생각했다. 밤마다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 쐐기풀을 뜯어 백조가 되어버린 열한 명의 오빠를 위해 옷을 짜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화형장으로 끌려가는 그 순간까지 입을 꾹 다문 채 손가락이 찢어지고 피가 맺히도록 쐐기 옷을 짜야 했던 공주처럼 여자는 재게 뜨개바늘을 놀렸다. 여자는 차라리 자신이 사악한 마녀의 주문에 걸린 것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심한 여자의 손놀림이 기계적으로 빨라진다. 손님이 들어와 가게 안을 둘러보거나 실을 고를 때도 여자는 뜨개바늘을 놓지 않는다. 손님이 수십 가지나 되는 실들을 뒤적거리며 색을 정하지 못해 망설이고 있을 때 여자는 조바심이 난다. 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보고 카탈로그를 펼쳐주거나 쌓인 실들 사이에서 색을 찾지 못할 때는 실 조각을 달아 스카치테이프로 색상을 분류해둔 견본을 내민다. 옷으로 짜였을 때와 색감의 차이는 의외로 다를 수 있다는 걸 여자는 강조한다. 조끼를 짠다며 오십 그램씩 여섯 뭉치가 들어 있는 1파운드짜리 감색 세트를 골라간 손님은 아마 뜨다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성인용 조끼 한 벌을 짜는 데는 그보다 두어 뭉치의 실이 더 들어간다. 떠보고 실이 모자라면 다시 오겠다고 손님은 고집스레 말했다. 실은 같은 색상이라도 삶는 염색 솥이 다르면 미미하지만 이색(異色)이 나온다. 여자는 뜨개질거리가 정해지면 아예 실을 모개로 구입하라고 충고한다. 같은 번호의 색상을 구할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손님이 두엇 다녀가고 나자 문밖 풍경이 흐릿해지며 가게 안의 불빛이 도드라진다. 철물점과 백양클리닝은 오늘 다시 안 올 모양이다. 다 뜬 앞판을 뒤판과 돗바늘로 잇고 목둘레와 진동둘레를 마감한다. 여자는 완성된 조끼를 바닥에 펼쳐놓고 흡족한 듯 바라본다. 작업복 잠바 속에 받쳐 입으면 톡톡한 것이 보온성이 뛰어날 것이다. 여자는 온수기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보며 전화번호를 누른다. 물이 떨어졌어요. 오늘 올 수 있죠? 별다른 말이 아닌데도 머릿속에 떠도는 그 말을 생각하자 가슴이 울렁거린다. 신호가 오래 울리도록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무슨 일일까. 보통 두서너 번 신호음이 가면 대뜸 안녕하세요, 아쿠아 생숩니다,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기 뜨개방인데요, 여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남자는 아, 안녕하세요, 어눌한 목소리로 이내 여자를 알아차리곤 했다. 통화 연결이 안 되니 메시지를 남기겠냐는 기계음을 듣고서야 여자는 송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드문드문 오가는 사람들이 통유리 상자 안에 든 인형을 바라보듯 여자를 흘끔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이내 걸음을 빨리하며 사라진다. 어둠이 내려앉는 이 짧은 일몰의 시간에 존재감을 잃어버리면 여자는 마음이 겉돌고 몸이 떠서 아귀가 맞지 않는 문처럼 덜컥거린다. 여자는 눈을 끔뻑거리며 문 밖에 둔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전화를 해볼까 망설이고 있는데 백양클리닝이 지나가며 이쪽을 유심히 쳐다본다. 롱 코트에 숄더백을 멘 차림새가 심상치 않다. 어깨 품이 조붓해 옷맵시가 나이답지 않게 예쁜 백양클리닝은 나 어때? 하는 표정으로 여자에게 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고는 사라진다. 백양클리닝에게 남자가 있다는 은근한 소문이 진짜일까?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은 종종 이율배반적인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백양클리닝이 여자와 천왕사와의 관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처럼.

여자는 조끼를 개켜 한쪽에 밀어둔다. 손에서 뜨개바늘을 놓으면 여자는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 같다. 늘 무언가를 뜨고 있었고, 뜨는 행위를 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뜰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존재감을 주었다. 더구나 이 조끼를 잡은 순간부터 여자는 몇 배의 존재감으로 차오르는 충만감을 맛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듯한 결락감이 몰려온다. 망연해 있던 여자는 출입문에 달아놓은 풍경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낮에 터틀넥스웨터의 값을 물어보고 간 젊은 여자다. 손님은 주저 없이 마네킹이 걸치고 있는 스웨터를 가리키며 입어 봐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여자가 건네준 스웨터를 들고 손님은 전신 거울 뒤의 좁은 공간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마네킹의 사이즈와 거의 흡사한 손님의 몸에 옷은 맞춘 듯이 품이 알맞다. 팔등신의 곧고 긴 몸매, 더군다나 두 번 접힌 목 부분이 손님의 군살 하나 없는 긴 목 아래로 차분히 퍼지며 터틀넥스웨터의 포인트가 제대로 살아난다.

손님이 옷값을 계산하고 나간 뒤 여자는 알몸으로 서 있는 마네킹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는다. 자신의 몸이 벌거벗고 있는 마네킹마냥 춥고 아리다. 그리 넓지 않은 가게 안이 텅 빈 듯 허전하다. 여자는 하수저장고가 있는 세면실로 들어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담뱃불을 붙인다. 오전에 한 차례 물을 뺀 하수저장고는 검게 팬 구덩이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물이 찬다면 여자의 몸을 삼키고도 남을 깊이다. 여자는 담뱃불을 끄며 부르르 진저리를 치듯 몸을 떤다.

가게로 나오자 주인 남자가 스웨터의 양쪽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어정쩡하게 서 있다. 좁은 가게 안을 훑어보던 남자의 눈은 열없이 비어 있는 여자의 눈을 스치듯 훑는다. 간혹 가위눌리는 꿈을 꿀 때처럼 여자의 몸이 오그라든다. 누군가 부엌 쪽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여자의 머리맡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다. 깨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여자는 점점 더 깊이 꿈의 타래 속으로 말려든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는다. 어느새 쪼여들었던 여자의 샅이 터진 토마토처럼 벌어지고 불거진 혹이 곧은 뼈로 펴져 바닥에 납작하게 눌린다. 자신을 내리누르는 완력이 주인남자인가 싶어 베일을 벗길라치면 이내 생수남자의 실루엣과 뒤섞여 헝클어진 실꾸리로 변한다. 꿈은 번번이 캄캄한 하수저장고의 검은 물처럼 차올랐다가 깨고 나면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말짱하게 비어버린다.

웨터 하나 도톰하니 짤 수 있나? 경망스러운 어린애 같던 주인남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평범한 중년남자의 점잖은 목소리로 돌아와 있다. 이젠 스웨터를 벗고는 못 살겠네. 주인남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양쪽 주머니가 축 늘어진 주인남자의 회색 스웨터는 벌써 몇 해나 입은 것처럼 후줄근해 보인다. 여자가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벨 소리에 주인남자의 눈이 여자의 도드라진 이마에 붙박인다. 그는 마치 눈으로 소리를 듣고 있는 귀머거리 같은 표정이다. 여자는 천천히 수화기를 든다. 안녕하세요, 전화번호가 들어와 있어서 전화 드렸는데요. 잘못한 것이 있는 아이처럼 생수남자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없다. 물이 떨어져서요. 생수남자는 여자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한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생수 배달을 그만뒀습니다. 여자는 뜨개방인데요, 라는 말을 목젖까지 밀어 올렸다가 삼킨다. 대리점 전화번호를 가르쳐 드릴까요? 더듬거리는 생수남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여자가 전화를 끊고 났을 때 주인남자는 가고 없다.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귀가 먹었던가. 유리문에 검은 콜타르가 엉긴 듯 밖은 농밀하게 들이찬 어둠뿐이다.

여자는 뜨개실을 고르고 뜨개바늘을 고른다. 5㎜짜리 바늘을 집었다가 다시 4㎜짜리 바늘을 집어 든다. 시작코를 거는데 머릿속이 멍해진다. 머릿속에 밑그림이 없는 뜨개질은 매듭이 없는 바느질과 같다. 하다못해 목도리조차도 첫코를 거는 그 순간부터 마음이 정해져야만 진행이 가능하다. 주인남자의 게이지를 가늠하며 코를 잡아가다가 알몸으로 구석에 서 있는 마네킹을 쳐다본다. 손님이 한둘 더 들기도 할 시간인데 출입문에 달린 풍경은 얌전하다. 여자는 코를 잡던 실을 풀어버리고 마네킹의 사이즈를 가늠하며 다시 첫코를 건다. 잡아가던 코의 수를 놓쳐 고개를 들자 몸을 말듯 웅크리고 앉아 있는 꼽추여자의 모습이 가게 유리문에 오롯이 도드라진다. 그 모습에 여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