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처럼 대리운전기사가 직업으로 인정받을 만큼 보편화된 나라는 전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으레 술자리로 이어지는 등 워낙 술을 즐기는 데다 빈번한 직장 회식문화 역시 세계 으뜸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대리운전이 성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대리운전 시장은 지난 2002년 이후 연평균 30%씩 성장해왔고 10만여명의 대리운전자가 오늘 밤도 전국 곳곳의 유흥가를 누비며 70여만명의 승객들을 집으로 모시고 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이 일을 하고 있을까 그들을 만나봤다.


[20대 구직자] 속도가 곧 돈…밥값이라도 벌어야죠
"취업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고 임시로 이거라도 해야죠."
20대 후반 대리운전기사 박모씨는 올 겨울 가장 추웠다는 1월 중순 어느날 저녁 6시쯤 매서운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섰다.

남들은 보통 퇴근하는 시간에 일을 하러 나가는 그에게 대리운전을 하게된 이유를 물었다.
"1년 이상 구직 준비를 하다보니 집에만 있을 수 없었어요. 수십 군데 이력서를 내봤지만 쉽지 않더라구요. 당분간 이렇게 밥값이라도 벌어야죠."

하지만 각종 술자리 등을 마치기에는 아직 좀 이르지 않냐고 묻자 그는 "저희는 밤 근무니까 지금 출근해야죠. 보통 주 6일제죠. 또 이 세계에선 속도가 곧 돈이에요. 아침 해가 비치기 전까지 가능한 많은 콜을 받으려면 남들보다 빨리 움직여야죠"라며 이내 단말기(PDA)로 눈을 돌린다.

고객의 전화가 오면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한다. 대개 고객들은 여러 대리 업체에 연락하기 때문에 먼저 찾은 사람이 임자가 되는 것이다.
"대리기사도 경쟁이 심해졌어요. 최근에는 심지어 20대 여성들까지 대리운전하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특히 투잡으로 하시는 분들도 많아 치열해요."

경쟁이 심하다 보니 중간에서 손님을 가로채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손님과 통화하고 곧바로 달려갔는데 10여분 뒤 약속장소에 손님이 없어 전화를 걸었더니 이미 다른 대리운전자와 함께 떠난 뒤였어요."
손님들이 빨리 타려는 생각에 이곳저곳에 한꺼번에 주문을 넣기 때문에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30대 주부] 여자라고 깔보는 시선 제일 힘들어요
"여자라고 깔보는 시선이 제일 힘들어요."
30대 중반으로 세 아들을 둔 주부 최모씨는 여자 대리기사의 고충을 털어놨다.

"대부분의 손님이 술취하신 분들이고 여자라고 이상한 눈으로 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특히 이년 저년하거나 심지어 추행하려는 분들까지 있죠. 그래도 그런건 거부의사 확실히 표시하고 안좋은 말은 한귀로 흘리면 돼요. 하지만 제일 힘든건 여자기사를 보면 수동이라 좀 서툴거라고 그러면서 아예 시키지 않으시려는 분들도 있답니다. 제가 이래 봬도 운전경력 꽤 되거든요."

대리운전이 힘든 만큼 벌이는 어떤지 묻자 "이일 처음에 할때는 아무래도 배워야 겠다는 생각에 월급제로 했어요. 그랬더니 제 손에 한달에 겨우 70만원 쥐어지더군요"하며 허탈해 했다.

이어 그녀는 "애들 셋 먹여살리려면 감수해야지 어쩌겠어요. 이렇게 열심히 살다보면 볕들날 있겠죠."
대화중에도 PDA 단말기를 수시로 확인하던 그녀는 주문 들어왔다며 이내 거리로 총총 사라졌다.


[40대 투잡족] 나같은 가장 많아…그만큼 살기힘든거겠죠
"네 식구 먹여살리려면 본업만 갖곤 힘든 세상이죠."
40대 초반 부동산중개업자 이모씨는 밤마다 대리운전기사로 14개월째 투잡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두 아이를 둔 네 식구의 가장인 그는 얼마 전부터 부동산경기가 침체되면서 애들 교육비에 조금이라도 보태려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대리운전도 경기를 타는지 안좋아 걱정이다.

"지난 연말에 대리기사 부르기 힘들다는 기사도 났던데 사실 전년만 못해요. 요즘 경기가 안좋아 그런지 전년에 비해 매상이 반 이상 뚝 떨어졌어요."

요즘 같은 매서운 추위에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본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초저녁부터 12~14시간씩 일하지만 저는 저녁 8~9시쯤 나와서 대부분 새벽 3시쯤 들어가요. 많이 추워졌어도 가끔 일이 많아 동트는 줄도 모르고 일할 때도 있어요. 그럴땐 토끼같은 자식들 생각에 오히려 더 어깨에 힘이 들어가요."

요새 투잡으로 대리운전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물었다. "40대 가장이 제일 많은 것 같아요. 또 주변에 철도공사 다니는 분이 한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저 처음 시작할때에 비해 여자분들도 많이 늘었구요. 그만큼 살기 어렵다는 거 아니겠어요."


[50대 가장] 다 떼고 나면 손에쥐는건 월 150~180만원
"대학생과 중학생 아들 생각하면 이렇게라도 생활비 벌어야죠."
50대 박모씨는 대학생과 중학생 아들을 둔 네 식구의 가장으로 매달 생활비 벌기에 급급하다. 자동차 판매영업을 하다가 사업에 손을 댔으나 잇따른 실패로 3년 전부터 대리운전을 하게 됐다.

손님에게 받는 돈 가운데 회사가 일률적으로 떼는 20%와 교통비, 보험료를 빼고 나면 월수입은 고작 150만~180만원가량이다. 네 식구 생계비는 턱없이 모자란다.

"혼자 이동할 때는 될 수 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요. 당연히 교통비 등을 아끼는 만큼 돈을 더 많이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죠." 이어 그는 콜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또 다른 곳으로 가봐야 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걸어라, 뛰어라, 참아라. 대리운전으로 돈을 제대로 벌려면 이 세 가지는 필수입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다보면 '오더'떨어지는 것 바로 받기 힘들어요. 그래서 자꾸 움직이죠."

그에게서도 대리운전의 고충은 빠지지 않았다.
"가장 흔한 문제는 고객이 집 근처에서 동으로 가자, 서로 가자하며 횡설수설하는 거예요. 많은 이들이 목적지에 닿고도 깨어나지 않는 것도 큰 문제죠." 그럴때면 할 수 없이 고객의 지갑을 뒤져서 주소를 알아내거나 고객 휴대폰을 통해 집전화를 알아내기도 한다. 이런 때에는 종종 도둑으로 오인받기도 한다고 푸념했다.


■대리운전 통해 본 경제 되짚기
국내 대리운전이 처음 나타난 것은 경찰이 휴대형 음주측정기를 도입한 80년대다.
그후 본격 대리운전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건 1997년 IMF 경제한파가 몰아친 이후부터다. 당시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됐는데 이들중 상당수가 대리운전업계로 몰렸다.

IMF이후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취업문턱이 높아졌다. 그렇다보니 최근 20대는 '88만원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며 안정적인 직업을 구하지 못하자 대리운전에 뛰어드는 사례가 늘었다.

게다가 30~40대 가장의 경우 사교육비 부담에 따라 맞벌이는 기본이고 투잡족이 계속 느는 추세에 따라 대리운전 업계에 대다수를 이루고 있을 정도다. 게다가 여성운전자들까지 아이들 교육비에 조금이라도 보태겠다고 대리운전에 뛰어들고 있다. 50대의 경우 IMF 이후 명예퇴직이 일반화되면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대리운전 기사의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자고 일어나면 또 생긴다'는 푸념도 들릴 정도로 대리운전 업계도 이미 포화상태다. 그러다보니 대리운전 업계에도 살아남기 위한 무차별 출혈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과도한 요금인하 등 '제살깎이식' 출혈경쟁은 물론 일부 업체들은 식당이나 단란주점 등 업소에 일정액의 수수료(커미션)까지 건네는 실정이다.

그렇다보니 무엇보다 피해를 보는 건 '대리운전기사'다.
일단 대리기사 일을 하려면 PDA가 필요한데 신제품의 경우 가격이 50만원에서 85만원대에 달한다. 이때 판매금액의 약 30%에 달하는 보조금이 지급되는데 대리운전회사들은 PDA판매회사들과 짜고 이 보조금을 중간에서 가로 채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지급되어야 할 보조금을 지원금으로 둔갑시켜 1년정도 지연해서 지급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대리기사는 법적으로 민간 개인사업자로 취급받아 불리한 계약을 하거나 보조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민사상 구제받을 수가 없다.

또 대리기사들은 한달에 평균 5만원에 달하는 보험에 가입한다. 대리운전회사들은 기사들로부터 보험료를 받지만 그중 절반 정도만 보험회사와 단체보험으로 계약하고 나머지는 중간에서 가로챈다. 이같은 관련 업체가 중구난방으로 난립하며 폐해가 잇따르자 재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