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되는 상상을 한 가지 해보자. 알다시피 유태인들은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해서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태인의 나라 이스라엘의 아이들이 독일 나치의 하켄 크로이츠가 새겨져 있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 만화 캐릭터에 열광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양식있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절로 탄식이 나올 것이다. 물론 다행히도 이스라엘의 아이들은 그렇게 살고있지 않다. 그러니까 당연히 말도 안되는 상상이다.

그런데 2008년의 대한민국을 보면 우려스럽게도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한민국의 어린 아이들이 옛 일본군의 군모를 쓰고 다니며 '지구침략'을 외쳐대는 귀여운(?) 개구리 캐릭터에게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케이블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케로로 중사'이다.

▲ 개구리 중사 케로로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이미 대한민국 어린이와 젊은층의 대표적인 문화코드이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인물들의 복장을 그대로 따라 입는 코스프레가 유행이고, 인터넷의 발달로 일본에서 방영되고 있는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다운받아서 컴퓨터 동영상으로 감상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이다. 요즘같은 세계화 시대에 좋은 문화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그러한 외래 문화가 자신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역사마저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생각을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강대국이 식민지를 지배할 때 가장 강력하면서도 반발이 없는 방식이 문화적 지배라고 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문화적'으로 지배한다는 의미는 그 나라 국민의 정신과 삶의 방식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은 지배당하는지도 모르고 그것이 자신의 당연한 삶인 양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문화적 지배인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일본 군복을 입은 케로로 중사에게 열광하게 되었다.

최근에 일본은 자신의 문화적 자랑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지속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찾기 위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2006년에 일본에서 방영된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는 한국의 애니메이션 팬들에게도 큰 인기를 끈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브리타니아'라는 제국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일본이다. 주인공 를르슈는 브리타니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를 제패하려는 강한 욕망을 가진 젊은이이다. 약간의 식견이 있는 사람이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브리타니아 제국은 미국을 뜻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게 패배한 이후로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일본의 답답함이 표현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보통국가를 외치면서 평화헌법을 개정해서 외국에 대한 공격이 가능한 군대를 보유하려는 욕망이 담겨있는 우려스러운 내용이다.

물론 일본에서 만들어진 만화나 애니메이션 중에는 전쟁의 비극을 고발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없지는 않다. 1999년에 일본에서 방영된 '지금, 거기에 있는 나'라는 작품은 군국주의 때문에 빚어지는 전쟁의 참상을 여과없이 보여주면서 국내의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많은 감동을 준 작품이다.

그러나 최근에 방영되는 애니메이션들이나 출판되는 만화에는 더욱 강력한 일본, 세계로 뻗어가는 일본에 대한 강한 욕망을 담은 내용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얼마나 열광하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우려스러운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문제인 것은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에서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은 현실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나라와 민족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모를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는 젊은 세대들에게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영향은 자칫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에까지 문화적 지배가 파고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현실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 애니에 숨겨진 일본 군국주의 향수 사례
 
 
#개구리 중사 케로로-
케로로 중사는 옛 일본군의 군모를 쓰고 다니며 '지구침략'을 외쳐대고 있다. 오프닝에는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승천기가 나온다.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주인공 를르슈는 브리타니아 제국(미국을 상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최근 보통국가를 외치면서 평화헌법을 개정해서 외국에 대한 공격이 가능한 군대를 보유하려는 일본의 욕망이 담겨있다.

#정치9단-주인공 카지 류우스케는 일본이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정규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는 억지논리를 편다. 또한 이 만화는 서방 거물들의 입을 빌려 일본 우익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반딧불의 묘-제2차 세계대전 중 죽어간 남매의 삶을 그린 작품. 그 이면에는 일본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는 메시지가 숨어있다.

#침묵의 함대-핵잠수함 '야마토'를 탈취해 독립국가를 세우려 하는 가이에다의 입을 빌려 세계평화를 위해 무력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대사각하의 요리사-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양민학살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이 이야기는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정당화하는 어이없는 결말로 끝난다.

#용-중국인 조씨의 입을 빌려 일제가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에 대해 평하는데,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인들은 자신의 지배자가 누구든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라며, 일본은 단지 통치 방식이 서툴렀을 뿐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