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내무부장관이 경기도 장관에게 보낸 공문서 '부군폐합에 관한 건(467호)'에 쓰여진 내용이다. 여기에는 강화군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네 섬은 면 폐합의 결과 한 면으로 할 예정)를 부천군으로 편입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지금은 인천의 옆동네인 경기도 '부천시'가 일제시대에는 인천지역을 아우르는 '부천군'으로 쓰였다는 역사를 보여준다.
대한민국 국가의 명칭이 바뀌어 가듯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명칭이나 경계에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같은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동안 고조선, 고려, 조선, 대한민국으로 국가의 명칭이 바뀌는 것은 입이 닳도록 외웠던 사항이지만 내 지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극히 저조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행정구역 명칭과 경계가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나 한번쯤 가져보게 된다.
1911년에서 25년까지 조선총독부가 만든 공문서 중에서 부·군·면 통·폐합과 관련된 문서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에는 원본 기록물 훼손에 대한 우려로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었던 자료들이다.
가슴아프게도 이 시기에 지방행정구역이 급격하게 변화된 것은 바로 일제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가 한국의 지방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통치체제를 확고히 다지기 위한 대책에서 나온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 중에는 부평군과 인천부 내에서의 '면' 통합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면 통합에 대한 중앙의 명령에 지방행정기관에서 반대의견을 개진한 부분도 엿볼 수 있었다. '여주군 외 6부군면의 폐합에 관한 건'에서는 '부평군은 현재의 15개 면을 5개 면으로 함에 있어서 이 가운데 계양면, 오정면은 면적·호수가 모두 표준에 달하지 못하지만 지형상 이 이상의 병합은 불가능하다고 도장관이 의견을 제출한 바도 있고 사정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고 나와 있다.
한편, 여기에서는 지역의 면장이 개인의 신상과 지역의 특성에 대해 올린 공문서를 통해 당시 인천사람들의 생활상에 대한 윤곽도 그려볼 수 있다.
지금도 인천의 지역명으로 남아있는 남촌과 주안이 당시 면의 이름으로 있어 눈길을 끈다.
1913년 인천 주안면장이 올린 문서에는 '취임하자마자 청년 실업회를 설립하여 매일 저녁 부업으로 짚신과 새끼줄을 제작하도록 하고 이에 따른 수익금은 공동저축하여 그 일부로 면내 일용품의 공동구매 자금으로 충당해 새끼를 꼬는 기계, 돗자리 짜는 기계를 매입하여 더욱 규모를 확장하고 생산에 힘쓰고 있다.
올해 2월 말의 저금 총액이 80엔에 달했다'라고 쓰여 있다. 또 '일본인을 유치하여 오동나무의 재배 및 원예 사업을 일으키게 하는 등 열심히 진력한 결과 식림 사상이 보급되기에 이르렀다'라는 문구도 나온다. 그 외에도 지역의 도로·교량의 수리나 개선상태, 과세를 위한 토지 지도의 제작 진행사항에 대한 보고도 함께 올라와 있다.
그러나 일제에 전달하는 문서로서 치욕적인 부분도 드러나고 있다. 1913년 인천 남촌면장이 쓴 문서에는 '한인은 종두(예방접종)를 싫어하고 꺼리는 누습(나쁜 관습)이 있는데 면장이 적절하게 타일러 일반에게 보급하고 또한 항상 청결법의 지속에 주의하는 등 위생사상의 고취에 힘쓴 결과 최근 본 면에는 전염병의 발생이 없었다'고 쓰여진 기록이 있다.
이 외에도 경기도장관이 정무총감에게 인천부 도면에 월미도와 사도가 게재돼 있지 않았다며 고쳐달라고 신청한 기록물의 원본과 1914년 당시 인천부, 부평군의 지도도 찾아 볼 수 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부·군·면의 통폐합이 빈번하게 이뤄지다보니 전통적인 지역 명칭이 많이 사라지고 새로 만들어졌는데 이번 자료 공개로 지역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